괴산 영풍 성지를 가다, (2016-09-24)
순전히 가정의 평화를 위해 카토릭 신자가 된, 일요일이면 마누라 손에 이끌려 성당에 나가는 놈이 성지에 갔다. 몇일 계속된 쾌청한 가을 날씨에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던터라 마다 할 이유가 없다. 08시에 성당에서 출발하는 일정을 알고 새벽 잠 많은 마님은 신바람이 나 05시부터 설쳐댄다. 이이석 안토니오 형제 차에 동승, 성당에 도착, 신부님 강복을 받고 총 대형 버스 3대중 1번 버스에 배당되여 8시15분경 출발하였다. 강복? 궁금해 찾어 보니; 강복 (降福, blessing)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 또는 복을 내려 주심을 뜻한다. 예컨대 미사나 신자들의 모임을 마칠 때 사제는 신자들을 향해 십자성호를 그으며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여기 모인 모든 이에게 강복하소서.” 하고 하느님의 강복을 빈다. 카톨릭 정보사전 재수 좋으면 멋진 가을 풍경 하나라도 건질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그 복심은 숨기고 카메라를 들고 성지 순례에 동참하게 된게 솔직한 고백이다. 신앙심 없던 놈이 성지에서 미사 본다고 특별한 감흥이나 경건한 신앙심이 생길수는 없는 법, 그저 덤덤한 일상의 하루였다는게 솔직한 고백이다. 200주년 영풍성당 정면 연풍 성지는; 연풍 병방골(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은 황석두 루가(1813~1866) 성인의 고향입니다. 성당측면 성인 루카 황석두 동상 황석두(黃錫斗) 루카 (1813년 ~ 1866년 3월 30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루카(Lucas)이다. 황석두는 1813년에 충청도 연풍에서 부유한 양반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그가 과거 시험에 합격토록 그를 공부시켰다. 황석두는 20세에 과거 시험을 보러 한양으로 떠났다. 한양에서 그는 주막에서 묵던중 한 박식한 천주교인을 만났다. 황석두는 그에게서 천주교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고 굉장한 감동을 받았다. 그는 그 천주교인에게서 몇 권의 천주교 서적을 받았다. 그는 그 천주교인이 떠난 후 사흘 뒤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놀란 그의 아버지에게 자신이 과거 시험에 급제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 그의 말은 하늘의 시험에 합격했다는 뜻이었다. 황석두는 아버지에게 심하게 매를 맞았지만, 천주교 신앙을 공부하는 것을 계속하였다. 황석두는 그의 아내를 천주교로 개종시켰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죽이려 들었다. 그러한 위협에 대한 반응으로, 황석두는 3년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온가족은 그의 무언증을 고치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그의 아버지를 포함하여 온가족은 애달퍼했고, 결국 황석두의 권면으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신자가 되었다. 비천주교인들까지도 황석두의 헌신과 충실함 그리고 훌륭한 성품에 감복하였다. 페레올 주교가 조선에 입국 했을 때, 황석두는 여생을 교회를 위해 봉사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절제와 금욕을 위해 주교의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 받고 독신으로 살았다. 주교는 황석두를 사제로 만들기로 결심했지만, 교황청에서는 조선에 황석두의 아내가 입소할 수녀회가 없다는 이유로 주교의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
황석두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친척들이 그의 재산을 모두 상속받았다. 페롱 신부는 황석두를 한문학 교사이자 교리 교사 및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그는 사제들의 복사직도 수행했다. 황석두는 그 의무들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그는 마침내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의 조수가 되었다. 그는 주교들과 함께 여러 권의 서적을 번역 및 저술하였다. 1866년 3월 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었는 데, 그는 황석두의 지식과 능변을 아까워하여 포졸들에게 황석두만은 체포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황석두는 한양으로 압송되는 주교를 수 십리 동안 뒤따라가 체포되어 주교와 함께 함께 압송되었다. 1866년 3월 30일 황석두는 사형을 선고받고 보령의 갈매못(충청도에 있던 해군 기지)에서 다블뤼 주교와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그리고 장주기 등과 함께 참수되고 군문효수되었다. 그렇게 그가 순교하던 때의 나이는 54세였다. 시복 · 시성[편집] 황석두 루카는 1968년 10월 6일에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집전한 24위[3]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4]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중앙 십자가 순교 현양비 형구돌 1866년 프랑스 신부와 천주교 신자들을 참수한 후 프랑스 함대가 서울을 침입하자, 흥선대원군(이하응, 1820~1898)은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조선땅이 더럽혀지는 것을 더 이상볼 수 없었습니다. “서양세력과 내통하는 자들은 모조리 잡아들이라!” 그리하여 고안된 잔혹한 사형도구가 바로 형구돌입니다. 이 형구돌은 연자방아처럼 크고 둥그런 모양인데, 바위 가운데 구멍이 나 있고 거기에 굵은 밧줄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올가미처럼 된 밧줄을 사람의 목에 걸면 돌 가운데 난 구멍 뒤에서 지렛대를 이용해 죽을때까지 잡아당겨 질식시키는 무자비한 사형도구였습니다. 연풍성지에서 4개의 형구돌이 발견되였는데, 1964년에 발굴된 첫번째 형구돌은 절두산 순교박물관에 기증 되였다. 기억에 남는 신부 님 특강: 1. 항상 생활의 첫 자리에 하느님을 모셔라. 2. 눈으로 보면 관광이고, 마음으로 보면 성지다. 간이 식당에서 점심. 단체사진을 위해 모이는 김에... 총무님 께서 단체사진을 찍기위해 배열 지시를 있다. 풍년을 약속하는 황금 들녁. 상현 성당에서 온 버스 3대외 여러 성당에서 왔나보다. 문경새제 박물관 전경. 뭘로 이 엄청난 공간을 채운다? 재주는 참으로 용타! 총 7대인가 8대로 문경새재 제1관문에서 제2관문까지 관람객을 실어 나른다. 1인당 편도 \1,000 달리는 관광열차에서 잡은 그림들-1 달리는 관광열차에서 잡은 그림들-2 달리는 관광열차에서 잡은 그림들-3 문경새재 드라마 촬영 셋트장 입구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