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이 부활하려나? / 신 재 실 교수 (2020-03-11 )
‘동물농장’이 부활하려나?
https://blog.naver.com/js9660/221847944203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본래 사회주의자였다. 1936년 12월 그는 스페인 내전(1936~1939)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인민전선의 정부군에 가담하여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반정부군에 맞서 싸웠다. 참전 10일 만에 목에 관통상을 입고 후송되어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오웰 부부는 스페인 공산당으로부터 트로츠키파로 의심을 받고 가택수색까지 당하고, 간신히 스페인을 빠져나왔다. 스페인 내전은 결국 프랑코 장군의 반정부부군 측 승리로 끝났다.
오웰은 자신이 가담해 싸웠던 스페인 시민군이 공산주의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제거당하는 것을 목격한 경험을 토대로 『동물농장』(1945)을 썼다. 사회주의를 신봉한 작가가 전향하여 그 위선과 기만과 폭력을 고발하고자 붓을 든 것이다. 『동물농장』은 이른바 파시즘에 단호히 반대한다. 파시즘은 1922년부터 1942년까지 이탈리아를 지배한 무솔리(Mussolini) 체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일평생 인간생활의 전 국면을 통제하는 전체주의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동물농장』은 공산주의국가인 소비에트 연방(1922∼1991)과 독재자 스탈린에 대한 신랄한 풍자로 가득 찼기 때문에, 오히려 반공주의 작품으로 읽히게 되었다.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별개의 개념이지만, 공산주의의 종착역은 으레 전체주의 일당독재였다는 세계사를 반증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2차 대전 이후 이 작품이 미국을 통해 널리 보급되었다거나 최초의 외국어 번역이 한국어 번역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터이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동물농장』은 그 풍자의 대상을 상실하게 되었다. 요즈음, 내가 현역시절에 학생들과 『동물농장』을 같이 읽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되돌아보면, 이른바 한강의 기적, 88서울 올림픽, 2002년 서울 월드컵 4위 신화 등으로 상징되는 대한민국의 국위 격상에 따른 국민적 긍지를 한껏 누리는 분위기에서 이 작품을 읽던 재미는 앨범에서 옛 흑백사진을 뒤져보는 것 같은 쏠쏠한 재미를 주었다. 소비에트의 붕괴로 『동물농장』에서 보는 것과 같은 전체주의 사회는 동구에서 뿐만 아니라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졌으며 대한민국도 예외일 수 없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여유였으리라.
그러나 요즈음 『동물농장』의 망령이 새삼 어른거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2006년 이후 언젠가, 서재를 정리할 때, 『동물농장』이 눈에 띄었다. 지금 생각하니 ‘날 버리려고요? 또 찾으실 건데요.’라고 말했던 것 같다. 나는 과감하게 버렸다. ‘설마하니 너를 또 뒤적일 일이 있겠느냐!’ 그런데, 2020년 3월 『동물농장』이 어른거린다. 그 스토리를 대강 더듬어 보자.
인간 존스(니콜라이2세)가 소유한 ‘장원(莊園)농장’에서 동물들이 그의 폭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머리 좋은 돼지들이 반란에 앞장섰다. 나폴레옹(스탈린)과 스노볼(트로치키)이라는 이름의 두 돼지가 지도자로 부상했다. 돼지들은 다른 동물들을 선동하여 존스를 쫓아내는 데 성공하고, 농장 이름을 아예 ‘동물농장’으로 바꿨다. 그리고 일종의 혁명공약인 ‘7계명’을 선포했다. 1. 두 다리로 가는 것은 모두 적이다. 2. 네 다리로 가거나 날개를 가진 것은 모두 친구다. 3. 어떤 동물도 옷을 입으면 안 된다. 4.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면 안 된다. 5. 어떤 동물도 알코올을 마시면 안 된다. 6.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이면 안 된다. 7.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혁명은 성공한 듯 보였다. 동물들은 일요일마다 모여 정책을 논하는 등 마침내 민주와 평등과 평화의 시대가 온 듯했다. 그러나 지능적인 돼지들이 서서히 농장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나폴레옹 등 권력에 굶주린 지도자들은 우유와 사과를 후무려서 그들 자신과 다른 돼지들을 위해서 배타적으로 배급한다. 언변이 뛰어난 스퀼러(몰로토프)는 ‘돼지는 항상 도덕적이며 결정에 오류가 없다.’고 다른 동물들을 세뇌하여 그들의 의식을 개조한다.
어쨌든, 동물농장은 한동안 평화를 유지한다. 그러나 전기 공급을 위한 풍차 건설 문제로 나폴레옹과 스노볼 간에 권력 투쟁이 벌어진다. 나폴레옹은 사나운 개떼를 동원하여 스노블을 동물농장에서 영원히 추방한다. 이후 나폴레옹은 동물들의 고난은 모두 스노블의 탓이라는 프레임으로 정치적 돌파구를 찾는다. 절반쯤 완성된 풍차가 폭풍에 쓰러졌을 때, 나폴레옹은 스노블에 책임을 돌리면서 재건축을 명령한다.
나폴레옹의 권력욕은 점차 증가하여 전체주의 독재로 치닫는다. 죄 없는 동물들로부터 “고백”을 강요한 끝에 전체 동물 앞에서 공개 처형하도록 한다. 처형은 개들이 담당한다. 이렇게 동물농장은 다시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뉜다. 혁명공약은 하나씩 무너진다. 나폴레옹 측근들은 ‘장원(莊園)농장’ 시절의 존스 측근들보다도 더 많은 부와 영화를 누린다. 아예, 존스의 집으로 들어가서 침대에서 자고, 옷을 입는다. 다른 동물에게는 무한정 일을 시키면서도 권력층의 돼지 자녀에게는 방도 따로 주고, 특수 목적 학교를 마치면 인간농장의 유명대학에 유학시키는 게 일상이 된다.
그러나 나머지 동물들에게는 무한정 일만 시킨다. 풍차 건설은 주로 복서(스타하노프) 등 힘센 말들이 맡는다. 이들 일꾼들은 ‘나폴레옹은 항상 옳다.’고 믿는다. 쓰러진 풍차의 재건축 명령이 떨어졌을 때도 복서는 있는 힘을 다해서 충성했다. 그러나 마침내 복서가 지쳐 쓰러졌을 때 나폴레옹은 그를 폐마 도살업자에게 팔아넘긴다. 이때 스퀼러는 성난 동물들에게 그는 수의사에게 넘겨졌으며 병원에서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거짓 선전한다. 동물들은 이 거짓 이야기를 믿는다.
어느덧, 일요회의도 없어진다. 이에 반항하는 자가 있으면 내쫓거나 숙청한다. 급기야 동물농장은 핀치필드, 폭스우드 등 이웃 인간농장의 주인들과 조약을 맺어 실제 돈을 만지는가 하면 때로는 인간들과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외양간 전투’, ‘풍차 전투’로 불리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전쟁에서 동물농장도 잃은 게 많고 인간 또한 피해가 막심했다. 이들 전투에서 다친 것은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총알받이가 된 동물들이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자신에게는 풍차 훈장을 수여하고, 나머지 동물들에게는 사과 하나, 새에게는 2온스의 옥수수, 개에게는 3개의 비스킷을 주며 치하하고 만다.
동물농장은 살벌한 전체주의 종착역에 접근한다. ‘7계명’이 하나씩 무너지면서 그 언어도 수정된다. 예컨대, 어느 날 밤 돼지들이 술에 취한 후에는 “어떤 동물도 알코올을 마시면 안 된다.”가 “어떤 동물도 알코올을 과도하게 마시면 안 된다.”로 바뀐다.
세월이 흘러서 동물농장은 이웃의 또 다른 농장을 사들이는 등의 방법으로 영토를 넓힌다. 그러나 집권층 돼지들 이외의 다른 동물들의 삶은 모질기만하다. 돼지들은 급기야 뒷다리로 걷기 시작할 뿐만 아니라 이전에 동물을 박해했던 인간들의 다른 특질까지도 많이 답습한다. 급기야 ‘7계명’은 단 하나로 축소된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동물농장』은 나폴레옹이 이웃 폭스우드 농장의 필킹턴 농부를 집으로 초대하여 인간과 함께 돼지들이 와인을 즐기는 디너파티로 끝난다. 나폴레옹은 농장 이름도 ‘장원(莊園)농장’으로 되돌린다. 창밖에서 이 파티 장면을 바라보는 다른 동물들은 누가 돼지이고 누가 인간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소설 『동물농장』의 결말을 보건대, 영국 작가 오웰은 공산주의 소비에트가 전체주의라는 종착역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것은 정확하게 예측했으나, 그 종말까지 내다보지는 못한 것 같다. 어쨌든, 소비에트 연방은 1991년 종말을 고했다. 이로써 동서 간의 냉전시대는 완전히 끝나고,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에 완승을 거두는 듯했다. 스탈린의 명령으로 6.25 전쟁의 참화를 겪은 대한민국 또한 공산주의 위협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듯했다. 1990년대 전반기, 『동물농장』을 읽을 때만해도 그런 기분이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공산주의는 사라졌는가? 아니다, 이제는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이 이른바 G2국가로 성장하여 옛 소비에트를 제치고 미국과 겨루고 있고, 러시아는 여전히 소비에트의 망령이 지배하고 있으며, 베트남 또한 어엿한 공산주의 국가로 성장한다. 중국, 러시아, 베트남은 자유 대한민국과 교역을 맺고 돈을 벌기도 한다. 북한은 어떠한가? 공산주의국가들과 친하긴 하지만 이미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다. 사회주의 깃발을 내걸지만, 실은 김일성 주체사상을 맹신하는 세계 유일의 세습왕조이고, 지구상에서 가장 혹독한 전체주의 국가 아닌가! 어쨌든,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는 지금 대한민국에 창궐하는 코로나19 따위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강력하고 치명적인 전체주의 바이러스가 여전히 내재한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탄생했다. 6.25의 폐허를 딛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으며, 마침내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우뚝 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대한민국 국민은 불안하다.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의 위협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내가 부둥켜안을 때/ 모순덩어리 억압과 착취/ 저 붉은 태양에 녹아버리네.”라는 노래를 또다시 불러야 하는 세월이 저만치 숨어있는 것일까?
“사람이 먼저다.”라는 구호가 정치판에 등장했을 때, 그 여섯 글자가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동물농장’ 같은 나라는 발도 못 붙이게 하겠다는 신성한 약속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이 먼저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다.”로 바뀌지 않았는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라는 대통령님의 말씀은 얼마나 가슴 뭉클한가! 하지만 피부로 느끼는 현실은 어떠한가? “모든 기회는 평등하지만 어떤 기회는 다른 기회보다 더 평등하며, 모든 과정은 공정하지만 어떤 과정은 다른 과정보다 더 공정하며, 모든 결과는 정의롭지만 어떤 결과는 다른 결과보다 더 정의롭다.”는 뜻으로 새겨서 들어야하는 실정 아닌가!
전체주의는 결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다. 히틀러의 나치즘은 민주주의 뿌리에서 자라지 않았는가! 민주주의의 혼란 앞에서 독일인들 스스로 전체주의를 택한 것 아닌가! 오늘의 대한민국도 혼란스럽다. “청와대가 주사파에 점령되었다!”는 말이 파다한가 하면, “중국은 우리의 친구이자 공동 운명체다.”라는 말도 서슴없이 나온다. 한 쪽에서는 “국민들은 우리 편이다.”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국민이 개, 돼지냐!”라고 받아친다. 이게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이러다가 ‘동물농장’이 부활하려나?
이불 속에서 눈 뜨고 생각한다. 나는 ‘개’인가? ‘돼지’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내게는 사나운 이빨도 없고, 날랜 발도 없으니 『동물농장』의 개도 될 수 없다. 그러면 돼지인가? 그저 먹고 살만 찌는 돼지라면 모르되, 스퀼러처럼 선전·선동에 능한 언변도 없으니 쓸 만한 돼지도 못 된다. 그럼, 일꾼인 복서처럼 일만하는 힘센 말이라도 되는가? 천만에, 일할 힘도 없는 늙다리이거니와 일거리조차 없다. 그럼 어쩌나? 살 때까지 살다가 죽을 수밖에! 그래, 죽어도 내가 사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