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외무부 장관 이동원의 비화
(1) 박정희와의 만남
1961년 4월 어느날 무교동 일식집 이학 (二鶴) .김동하 (金東河) 해병 소장이 바쁜 걸음으로 헐레벌떡 들어왔다. 이어 작은 체구에 얇은 스프링 코트를 걸쳐 입은 한 40대 남자가 뒤를 따랐다. 나를 보자 金장군은 "늦어서 미안하다" 고 말한 뒤 박정희 (朴正熙) 장군을 소개했다.
朴장군도 "반갑소, 李박사" 하며 내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앉자마자 맥주컵에 정종을 가득 채우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이내 침묵이었다.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허공만 바라볼 뿐 도무지 말이 없었다.
그러기를 무려 한 시간여. 답답하다 못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게 뭐야! 사람을 보자고 했으면 뭐든 얘기를 해야지' .나는 은근히 화가 났다.
金장군은 국방대학원 시절 내 강의를 들은 이후 가까워진 사이였다.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金장군에게 더러 농담을 건네보기도 했지만 朴장군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계속 술만 들이키며 담배를 피우는 바람에 방안은 온통 연기로 가득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朴소장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李박사, 내가 쿠데타를 하면 미국이 어떻게 나올 것 같소?"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순간 황당하다는 느낌 말고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야말로 기습적인 질문이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나는 "지금 쿠데타라고 하셨습니까?" 라며 재차 확인해 봤다.
하지만 결코 실언 (失言) 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초면인 나에게 왜 천기 (天機) 를 누설하는 것일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언뜻 짚이는 게 있었다.
'혹시 나의 국방대학원 강의내용을 전해 들은 건 아닐까. 그래 맞아. 바로 그거야' .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朴장군, 장면 (張勉) 정권이 유약하긴 하지만 1년도 채 안됐습니다. 시기적으로 너무 이르지 않겠습니까. 이 정권이 과연 어떻게 하는지 좀더 지켜본 다음에 해야 '정권욕 때문' 이라는 비난을…. " 내 얘기가 '쿠데타 시기상조론' 쪽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는지 朴장군은 "李박사, 그렇지 않소" 하며 내 말을 중간에서 가로챘다.
그러면서 "그 문제는 내가 나중에 설명할테니 우선 대답부터 하소!" 하며 다그치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느라 담배를 한대 피워 물었다.
글= 이동원 의원
◇ 이동원은 누구인가
올해 나이 73세인 이동원 (李東元) 의 현 직함은 국민회의 소속 전국구 의원이자 중앙당 상임고문이다.
그러나 40대 이후 세대들에게는 '60년대초 한국외교의 활로를 개척했던 30대 젊은 장관' 으로서의 이미지가 더욱 강하게 남아 있다.
65년 한.일협정 조인과 국군의 월남파병, 국내 건설업체들의 중동 (中東) 진출 등은 그의 패기가 일궈낸 '한국외교의 개척사' 로 기록될 수 있다.
5.16 이듬해 청와대 비서실장직을 시작으로 ▶태국 대사 ▶최연소 외무장관 ▶7.8대 국회의원, 정우회 (政友會) 총재 ▶국회 외무위원장 ▶스위스 대사 ▶10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는 동안 그는 역대 정권들로부터 자신의 능력을 꾸준히 검증받아 왔다.
그는 일찍이 중학 때부터 반일운동에 앞장선 학생운동의 원조 세대다.
연세대 학생회장 시절에는 반탁운동을 전개, '고려대 이철승 (李哲承)' 과 쌍벽을 이루기도 했다.
오늘부터 연재되는 '오프 더 레코드' (off the record: '非報道' 를 뜻하는 언론용어) 는 '영원한 열혈청년' 이동원이 걸어 온 역사의 뒷얘기들이다.
그는 자연인으로서도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 (軌跡) 을 그려 온 흔치 않은 인물이다.
함남 북청 (北靑) 출신의 한 소년이 해방과 전쟁.분단.근대화로 이어지는 격랑의 물결을 어떻게 헤쳐 왔는지 생생하게 들려 줄 것이다.
얘기는 박정희와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김성진 기자
35. 최규하씨 '새옹지마'
관료경험이 없던 나는 외무장관이 된 후 장관 특별보좌관인 최규하(崔圭夏)대사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런 관계로 나는 崔대사의 영국행이 좌절되자 그를 호주 대사로 밀었다.
그런데 이주일(李周一.전 최고회의 부의장)감사원장이 장관실까지 달려와 막았다. 그는 당시 이동환(李東煥.전 내무차관) 호주대사와 막역한 사이인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崔대사와 의논끝에 말레이시아로 밀어 붙이기로 했다. 그곳에는 5.16당시 논산 훈련소장을 지냈던 최홍희(崔泓熙)장군이 초대 대사로 있었다.
그러나 朴대통령은 "그 친구 그냥 불러 들이면 가만히 있지 않을거야. 전부터 잘 알지만 성깔있는 친구니 웬만하면 그냥 놔 두지" 하며 만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불러들인 뒤 좋은 곳으로 보내주겠다' 고 설득했다. 대통령은 일단 승락을 하면서도 "분명히 본인 양해하에 그렇게 하라고 했어" 하며 거듭 다짐을 받았다.
나는 崔대사에게 자필 편지로 양해를 구했지만 그는 심사가 뒤틀렸던지 그후 캐나다로 건너 가 버렸다. 그는 그곳에서 반체제 운동을 전개했고 66년에는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창설, 반한활동의 선봉에 서고 말았다.
'인간만사 새옹지마' (塞翁之馬)라고 했는데 최규하 대사가 꼭 그랬었다. 영국.호주가 잇따라 좌절된 뒤 탐탁치 않는 심정으로 말레이시아에 부임했던 그는 2년 후인 66년 2월 朴대통령의 동남아 순방때 눈에 띈 것이 계기가 되어 그후 외무장관-국무총리-대통령으로 승승장구했으니 말이다.
한편 백선엽(白善燁) 프랑스 대사가 캐나다로 일찌감치 정리되자 나는 후임에 김활란(金活蘭.전 이대총장)박사를 추천했다.
朴대통령은 "왜 프랑스에 '치마' 를 내 보내려고 해□" 하며 마땅찮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드골 대통령이 '치마' 를, 그것도 교양있는 '치마' 를 좋아한답디다" 고 했더니 朴대통령은 빙긋이 웃기만 했다. 사실상의 내락이었다.
金박사는 그러나 자신의 건강 때문에 결국 외무부 순회대사에 그치고 말았다. 어쨌거나 金박사는 한국 최초의 여성대사라는 기록을 남겼다.
결국 프랑스 대사에는 베테랑 이수영(李壽榮)씨가 임명됐지만 여기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朴대통령은 '이수영' 이란 말을 듣는 순간 "그 친구는 무조건 안돼!"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연인즉, 李대사가 64년 5월부터 잠시 공보부장관으로 일할 때 발생한 언론파동 때문이었다.
당시 공화당이 신문윤리위원회 권한을 확대해 언론을 규제하려 하자 전 언론이 일어나 반대를 했는데 이 때 李대사가 언론편에 기울어 朴대통령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외무부는 64년 10월 6일 이같은 내용의 공관장 인사내용을 발표했다. 김정렬(金貞烈.전 국방장관)주미대사가 김현철(金顯哲) 전 내각수반으로 바뀌는 등 군출신 대사들이 대거 교체된 반면 신규임용은 태국대사 장성환(張盛煥.전 공군참모총장)씨등 소수에 불과했다. 군부쪽 불만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0월말 張대사 태국부임 송별회가 신당동 요정에서 열렸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 더니 그곳에서 민기식(閔機植)육참총장과 조우하게 됐다. 술이 몇차례 돌기도 전인데 閔장군이 느닷없이 정종 한 잔을 가득 채우더니 내게 술 잔을 집어 던지며 욕을 퍼부어 댔다.
"야, 외무부 하고 국방부하고 정말 한번 붙어 볼래□ 너희들 총 있냐□ 순 입만 가지고 하지□ 우리는 총 있다!" 나도 지지 않았다.
"군인도 능력이 있으면 쓰는 거요. 여기 있는 張장군도 태국대사로 가고 독일의 최덕신(崔德新)대사도 군 출신 아니요□" 그러자 극도로 흥분한 閔총장은 "뭐야□" 하며 소리를 지르더니 엉겁결에 허리에 차고있던 권총을 더듬는 것이었다. 바로 옆에 있던 張대사등 다른 장성들이 그를 말리느라 술자리는 순간 아수라장이 돼 버렸다. '싸우다 정든다' 고 그 후 閔총장과 나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됐다.
이동원 전 외무
(38) 월남전 파병의 내막
'좋은 전쟁' 이 있을 수 없듯이 '나쁜 평화' 도 없다고 한다. 월남전이 끝난지 4반세기가 지났지만 지금도 아물지 않는 전쟁의 상처를 보고 있노라면 더욱 그렇다.
한국군은 64년 9월부터 73년 3월까지 8년 6개월 동안 연인원 32만 여명을 베트남전에 참전시켰다.
그중 5천여 젊은이들이 이국땅에서 아까운 목숨을 불살랐고 아직도 수많은 고엽제(枯葉劑)피해자들이 고통의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 경위야 어떻든 초기 협상에 관여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요청보다는 당시 한국정부의 총체적인 국가발전 전략의 하나로 추진됐었다.
파월(派越)장병들이 흘린 피와 땀은 한국 현대화의 기초가 됐다는 점에서 그 희생은 참으로 숭고한 것이었다.
파병 문제는 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케네디와의 회담에서 '미국이 지원해 준다면 정규군을 보낼 수 있다' 고 말하면서부터 본격 거론되기 시작했다.
朴대통령은 이미 그때부터 파월 결심을 서서히 굳혀갔던 모양이다. 나는 朴대통령의 파병결심이 그분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이 한국전쟁때 우리를 도와줬으니 우리도 미국을 도와야 한다는 명분론과 '전투경험을 해 봐야 진짜 군인' 이라는 실리적 판단이 그분으로 하여금 파병을 결심하게 했을 것이다.
朴대통령은 64년 5월 브라운 주한 미대사로부터 존슨 대통령의 '비전투 병력 파병요청 친서' 를 전달받고 아무런 조건없이 이를 흔쾌히 수락해 줬다.
이동외과병원(MASH) 의료요원 1백 30명과 태권도 지도요원 10명 파견방침이 일사천리로 결정됐다. 내가 외무장관이 된 7월에는 이미 전투병력 파병도 내부적으로 거의 결정된 상태였다. 8월2일 통킹만 사건이 터지자 미국은 한국에 전투병력을 보내달라며 더욱 안달을 떨었다. 미국의 통킹만 기습상륙을 계기로 월맹 정규군은 월남침투를 시작했고 전쟁은 갑자기 확전으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64년 10월초 번디 미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의 방한은 그 시작이었다. 이대로 놔 둔다면 한국이 전투병력을 보내도 미국은 '고맙다' 는 말로만 공치사를 끝낼 공산이 컸다.
나는 한국 젊은이들이 국제적으로 별로 호응받지 못하는 전쟁에 갈 수밖에 없다면 미국으로부터 뭔가를 얻아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번디는 10월 2일 청와대 예방을 앞두고 내게 '베트남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며 슬쩍 떠 보았다.
내가 '미국이 왜 전쟁에 개입했는지 모르겠다' 고 외곽을 때리자 번디는 '그야 자유월남을 공산세력으로부터 보호하자는 것 아니냐' 며 정색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존슨대통령이 이제 힘으로 월맹을 굴복시키려 하니 한국이 도와줄 수 있겠느냐' 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나는 "그거야 대통령이 결정할 문제" 라고 빠져 나왔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번디는 朴대통령을 만나자 "미국은 지금 어려운 입장입니다. 존슨 대통령이 각하께 미국의 처지를 말씀드리라고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며 말 문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끝내 '전투병력 파병' 이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朴대통령이 먼저 '파병' 이라는 말을 꺼내도록 유도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朴대통령은 "미국은 전쟁을 한다면서 북폭(北爆)도 해안봉쇄도 않고 그저 17도 선만 지키려 하니 그게 무슨 전쟁이요□" 하며 군사전략가다운 식견을 드러냈다.
번디의 눈이 마치 먹이감을 만난 사자처럼 번쩍이더니 '존슨 대통령도 중대결심을 하려 하는데 북폭과 해안봉쇄도 포함된다' 고 거들었다.
朴대통령은 내가 제지할 사이도 없이 "존슨 대통령이 그런 결심으로 군사협조를 요청한다면 언제든지 미국을 도와 줄 용의가 있다" 며 확답을 해 버렸다.
번디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도는 순간 나는 그의 '승리감' 에 찬물을 끼얹을 묘안을 짜내고 있었다.
이동원 전 외무
47. 아스팍창설 뒷얘기
1964년 10월초 외무부 출입기자들과의 오찬 도중 '아.태각료이사회(ASPAC)' 창설 추진에 관한 정보가 노출된 사실을 알고 나는 몹시 긴장했다.
나는 "비밀리에 추진중이니 제발 '오프 더 레코드' 로 해 달라. 이 기구가 결국에는 한국이 주도하는 최초의 아.태지역 협력기구가 될 것" 이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그러자 김영일(金榮一.전 연합통신 사장)기자등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른 기자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도하 각 신문들은 '아스팍 창설' 기사를 일제히 1면 머리기사로 올려 놓았다. 평소 나를 '눈엣 가시' 로 여기던 일부 정치인들이 이 사건을 그냥 놔 둘 리 없었다.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이들은 '젊은 장관을 앉히니 저모양' '국제 현실을 무시한 채 분수도 모르고 쇼하다 나라 망신 시킬 것' 이라는둥 나를 겨냥했다.
朴대통령도 나를 불러 호통을 쳤지만 나는 대통령 심기가 가라앉을 때쯤 '아스팍 창설로 한국의 국제위상이 올라가면 무역.차換돛?등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되고 다른 국가와도 어깨를 나란히 하며 발전할 수 있다' 고 설득했다.
朴대통령은 경제발전을 최대의 과제로 여기고 있던만큼 경제 관련이라면 무엇이든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의 내락을 얻어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했던가.
65년초 아시아 외교의 거물로 동남아 지역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코만 태국 외무장관이 한국을 방문했다.
나로선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나는 그무렵 '잘 나간다' 는 기생집(청운각)으로 그를 모신 다음 파격적인 접대로 그의 마음을 사로 잡으려 했다.
나로선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나는 그무렵 '잘 나간다' 는 기생집(청운각)으로 그를 모신 다음 파격적인 접대로 그의 마음을 사로 잡으려 했다.
"형님은 이미 아시아 지역에서 평가받고 있는 최고 외교관이 됐으니 이번에는 동생을 도와 큰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며 간절히 부탁했다. 한껏 흥이 오른 코만은 내 청을 흔쾌히 받아 줬다. 교두보는 확보한 셈이었다.
65년 6월 나는 이 문제를 협의하러 동남아 순방에 나섰는데 라만 말레이시아 수상은 베트남전에 대한 부담 때문에 '미국배제.일본참가' 라는 조건부 승낙을 해 줬다.
장제스(蔣介石)대만 총통은 아스팍이 중공(中共)의 위협에 대처하는 군사기구로 만들어 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이긴 했으나 출발이 순수할수록 좋다는 내 설명에 기꺼이 양해해 줬다.
그러나 일본은 각료회의에서 이미 '아스팍 불참' 을 결정해 놓고 있어 사실상 그 열쇠를 쥐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65년 10월 도쿄 시내 긴자(銀座)의 한 술집에서 시이나(椎名悅三郞)외상을 만나 통사정을 했다.
한.일 회담을 추진하느라 우정까지 흠뻑 들었던 시이나는 대뜸 '각의 결정을 번복하려면 사토(佐藤榮作)수상의 결단이 필요하다' 며 다음날 사토와의 술자리를 마련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운명의 다음날 밤 10시 시이나 외상이 사토수상과 함께 나타났다.
일본 수상이 외국 정치인과 술집에서 만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가자 나는 사토에게 "선배님, 부탁이 있는데 꼭 들어 주셔야겠습니다" 고 했더니 사토는 "대의(大義)를 위한 일이라면 못 들어줄 게 없지" 하며 대범하게 나오는 것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아스팍 출범을 도와 줘야겠다" 고 했더니 사토는 처음과는 달리 시원한 대답을 못 했다. 내가 '수상께서 방금 들어 주기로 약속하지 않았느냐' 며 떼를 쓰고 달려 들자 옆에 있던 시이나 외상이 '일단 약속했으면 정치 선배로서 지켜야지' 하며 거들어 주는 것이엇다. 그바람에 사토도 결국 이를 수락하고 말았다.
66년 2월 朴대통령은 아스팍 협상 마무리를 위해 동남아 국가를 순방했고 그해 6월14일 마침내 서울에서 아스팍 창설총회가 열렸다. 아스팍은 한국주도로 창설된 최초의 국제기구로 지금의 아.태경제협력체(APEC)의 모태가 됐다는 점에서 한국 외교사에 남을 쾌거였다.
이동원 <전외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