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나라 인도

인도 - 아그라-아그라 성 [ 2006-01-17 ]

고향 길 2018. 8. 22. 07:36





 

잔시 열차 플랫트 홈으로 가고 있다.

잔시에서 특급열차를 타고 아그라로 가기위해 플랫트 홈에 서 있다.

 

아그라는 ?
인구 약 1백20만명, 인도북부 우타르프라데시주의 서부에 위치하며 델리에서 남쪽으로 204km 떨어진 곳에 있다.
아그라는 힌두의 대서사시 “ 마하바라타 “에 천국의 정원이라는 뜻의 “ 아그라바나 “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을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다. 그러나 만일 아그라에 “ 타즈 마할 [ Taj Mahal ] 이 없다면 아마도 인도의 한 평범한 도시중의 하나에 불과하였으리라.
타즈 마할을 세운 회교세력과 아그라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501년으로 이 즈음에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한 술탄 시칸데르 로디가 이곳을 수도지로 정함으로써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무굴 [ Moghul ] 제국의 수도가 된 아그라는 아크바르로부터 샤 자한에 이르기 까지 무굴 제국이 전성기를 누리는 동안 무굴 제국의 수도로 존속해오며 인도 천하의 중심지로 군림하였었다.

무굴제국은 1558년 수도를 델리에서 아그라로 옮겨, 1564년~1574년, 10에 걸쳐 막대한 예산으로 아그라성을 건축하였는데, 사자한 왕 때 지금의 모습이 갖추어졌다. 무굴제국이 1658년 수도를 다시 델리로 옮길 때까지 약 100년간 수도로서 북부 인도를 다스리는 터전이 되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지배를 받을 때도 주변지 구의 행정중심지로서 그 역할을 다 하였으며, 오늘날도 지방행정부의 청사가 아그라에 있다
무굴 제국 ?
굴제국은 몽고의 후손들이 세운 우즈베크 공화국에서 태어난 바부르로부터 시작한다. 바부르는 원래 인도보다 사마르칸트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티무르의 옛 영광을 되찾고 싶어했다. 하지만 두 번에 걸친 시도에서 오히려 고향까지 잃어버린 그는 차선책으로 유명한 파니파트 전쟁을 통해 당시 쇠락해 버린 델리의 로디왕조를 물리치고 무굴제국을 세운다. 바부르의 인도 진출은 인도 역사상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훌륭한 군인이며 정치인이고 동시에 예술애호가로서 시인이기도 했던 바부르는 세계역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 중 하나인 동시에 인도 역사에서 무굴제국이라는 새 장을 탄생시킨 인물인 것이다.

바부르한편 인도에 새로운 전쟁의 기법을 소개했다. 대포와 같은 화기를 이용한 전술적 효과를 확연하게 입증(실지로 파니파트 전투에서 10배가 넘는 상대를 불과 3시간만에 초토화시킴)시킴으로써 코끼리를 주로 이용했던 인도권에게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또한 뛰어난 설득력과 통솔력의 소유자로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페르시아어와 아랍어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모국어인 터키어 작가 가운데 가장 유명한 한 사람이었을 정도로 뛰어난 예술가였다. 그가 직접 저술한 자신의 회고록은 오늘날 세계고전 문학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수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뒤를 이은 후마윤은 선왕때 거듭된 전쟁으로 중앙집권적인 행정조직을 갖추지 못한 제국을 계승 받았다. 또한 강력한 저항세력인 아프가니스탄계를 물리치고 영토의 확장을 꾀하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쫓겨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이란으로 도망간다. 후마윤을 중심으로 한 무굴인들은 비록 영토는 바부르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지만 수적으로는 여전히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동생들마저 호시탐탐 형의 지위를 노리는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여기에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해할 수 없는 방심을 보였던 후마윤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의 패배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도망간 사이 델리에는 후마윤을 물리친 쉐르 칸이 스스로 '쉐르(호랑이) 샤'(아프가니스탄계의 지배자라는 뜻)라고 부르면서 델리에 수르 왕조를 건립한다. 그는 짧은 기간이지만 무굴제국의 전반적인 국가조직에 중요하 토대를 제공했다. 관료조직을 정비하고, 화폐개혁을 통해 물가안정을 취하고, 토지를 측량하여 토지세 징수를 효율적으로 개선하면서 국가경제의 안정을 이루었다. 그는 북인도의 서쪽과 동쪽을 잇는 그랜드 트렁크 로드를 건설하고 여행자의 편의를 위해 8킬로미터마다 숙소를 세우기도 했다. 이같은 노력은 후예 무굴제국의 악바르에게 계승되어 제국의 기틀을 다지는데 결정적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수르 왕조는 겨우 15년만을 유지한 뒤 이란의 도움을 받은 후마윤에 의해 멸망당하고 만다.
후마윤의 뒤를 이은 악바르는 북인도 전역을 차지한 뒤 남부의 데칸 지역까지 차지하면서 마우리야 왕조 이후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하는 국가를 이룬다. 그는 영토 확장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의 제반 분야에서도 무굴제국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고, 인재의 등용에 있어서도 힌두교도에게도 평등하게 기회를 주었다. 악바르는 델리 술탄 시대의 문제가 왕권의 약화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슬람교를 활용했다. 종교적으로도 이전의 이슬람 왕조와는 달리 이슬람 이외의 종교를 포용하는 융화책을 취하였다.
악바르의 뒤를 이어 제항기르가 제위를 이어갔으며, 제항기르 이후 샤 자한이 형제간의 분쟁을 통해 승리하면서 왕위를 계승하였다. 샤 자한은 즉위하자마자 무굴제국의 지배를 벗어나 있던 데칸 지역 등 여러나라를 정복하는 일에 착수하였으며, 그 결과 악바르 시대보다 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샤 자한은 정통적인 이슬람교도로서 건축과 미술을 포함한 모든 예술 분야에서 페르시아풍을 강조하였다. 낭만적인 성격이 강했던 그는 특히나 건축광이라 불릴 정도로 건축에 관심을 많이 쏟아 타지 마할, 델리 성, 자미 마스지드를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아그라 성을 재건축하기도 하였다. 이 건축물들은 모두 후세에 무굴제국 시대의 대표적인 작품들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타지 마할은 특히나 그의 아내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결부되어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관광객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샤 자한의 뒤를 이어, 형제들간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 끝에, 심지어 아버지마저 유폐시킨 뒤 왕위에 오른 아우랑제브는 처음부터 무굴제국을 철저하게 이슬람 세계로 만들기로 결심했다.궁정 안의 힌두교적 요소를 없애고, 사원을 파괴·폐쇄하고, 힌두교도에 대한 인두세를 차별 부과하는 등 편협된 타종교 억압정책을 썼다. 이는 결국 많은 힌두교도의 반항과 반란을 야기시키고 결과적으로 무굴제국 쇠퇴의 한 원인이 되었다


역시 테마세이 답다. 야간에 보는 타지마할이 환상적이니, 야간에 보도록 한번 시도해 보자고 한다. 안개는 짙게 깔렸고, 파키스탄의 테러리스트들의 위협에 타지 마할 경내의 조명은 모두 꺼버려 칠흑같이 어둡기만한데 우리 일행은 혹시나 싶어 버스에서 내려, 도보로 가장 가까히 접근할수 있는 곳을 향해 빠른 걸음을 옮기고 있다

팀원 중 전인화 회원이 미화 50불을 쾌척해, 싫다는 기사에 특별 보나스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나선 야간출동인데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다. 내일을 기약하고 야간 훈련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1월 17일, 아그라의 새벽이 밝았다.
아르가 성에서 일출을 바라보며, 당당한 모습의 아르가 성을 관광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자리가 예사로운 자리가 아니다. 저 멀리에 타지 마할이 내려다 보인다. 여기서 잠깐 아그라 성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견고하고 화려한 아그라 성(Agra Fort)
1565년 무굴제국 제3대 악바르 대제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그 이후 자한길, 샤 자한에 의해 보강되어 증측되었다. 길이 2.5 km에 달하는 붉은 빛의 사암의 성벽인 아그라 성은 타지마할의 북서쪽, 야무나(Yamuna)강을 따라 만들어 졌다. 전쟁을 위한 견고한 성으로 이중으로 이루어진 굴, 이중으로 이루어진 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외측에 비해서는 견고함이 대조적인 내부의 궁전은 화려함의 극치로 지어져있다.

높은 성벽을 지닌 곡선모양의 성채는 웅장한 성문인 아마르 싱(Singh)만을 위한 것으로, 지금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다. 원래 웅장한 아구라성 입구는 '하티폴(Hathi Pol)'혹은 '코끼리문(Elephant Gate)'라고 부르는 내부 정문으로 이어지는 델리게이트를 통해 들어 갈 수 있었다.

아그라성에서는 멀리 타지마할이 보인다. 샤 쟈한는 만년에 자식에 의해 이 성에 유폐가 되어서 매일 아내의 묘를 바라보며 생활했다고 알려졌다.

아그라성내의 건축물
- 디완이암 (Diwan-i-Am)
1628년 샤자한이 건립한 디완이암은 강연장으로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 졌다. 3개의 열을 지어 세워진 돌기둥들은 백색 치장벽토로 기둥벽을 꾸미고, 공작의 꼬리털모양의 아치형으로 마무리되어 지붕을 지지하고 있다.

- 모티 마스지드(Moti Masjid)
샤자한이 1646년부터 1653년에 세운 대리석 사원으로 '진주 모스크'라고도 부르고 있다. 완벽한 균형비를 이루고 있는 사원은 페르시아의 명각은 완벽한 진주에 비유되고 있다. 광할한 사원 뜰 중앙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연못이 있다.



저 멀리 내려다 보이는 타지 마할을 바라보며 죽은 왕비를 애틋하게 그리고 있는 샤 자한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아침 식사를 하고 나면 드디어 한번 보기를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타지 마할을 관광하게 된다.아래 그림들은 이번 여행중 룸 메이트로 13일간 동거 동낙한 T.J.Kim 께서 보내주신 사진들입니다. 

인터콘티넨탈 호텔 로비에서 박장대소하고 있는 모습. 김 선생께서 가라사대 " 초청장 없는 곳은 바뻐서 못가니 초청장을 보내라 " " 백수 과로사 " 란 말 듣지도 못했는냐, 오라는데는 없어도 갈대는 많은 사람이다!!! 이 말에 터지는 폭소를 참을수가 없어서...

실크교도 복장을 한 호텔 포터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