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추억 만들기

2007-동창회 가을 나들이 - 1 [ 2007-10-26 ]

고향 길 2018. 1. 4. 06:50

2007년10,월26일

이번 동창회 야유회는 강북쪽으로 방향을 잡어 경기도 파주시와 연천군으로 정해졌다.처음으로 강북쪽 나들이다 보니 처음 가보는 문화 유적지 들도 있었다.버스 2대로 100여명 동창들이 부부동반으로 압구정 현대 백화점을 8시30분경이 되여서 출발. 비가 내릴거로 일기예보는 알렸지만 날씨는 쾌청, 안개가 좀 끼였을뿐 나들이 하기엔 좋은 날씨다.
萬 山 紅 葉, 글자 그대로 붉은 단풍이 온 산을 뒤덥고 있다. 설악산 단풍이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뉴스에 마음은 조급해지고, 적당히 갈곳을 찾지못해 전전긍긍 하고 있던 차에 동창회에서 강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는게 아닌가 !바로 어제 분당 율동공원을 찾어 핏빛, 주홍빛, 노란빛, 파스텔톤처럼 은은한 빛으로 물들어가는 단풍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강북이 더 화려한 단풍의 파노라마를 연출하고 있겠구나 생각을 했었다. 문화유적지 탐방인데 생명의 마지막을 붉게 불태우고 있는 단풍의 아름다움에 숨이 막혀 자원봉사자들의 설명은 귓전에도 들리지 않었다. 생명이 숨을 죽이고 웅크리는 삭막한한 겨울의 문전이 붉게 불타는 단풍이 있어 외롭고 쓸쓸하지만은 않은가 보다. 문화유적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지더래도 카메라를 멈출순 없다!

파주시: 반구정과 자운서운.   연천군: 경순왕릉과 숭의전

 오늘 하루 우리일행을 책임진 철마 두필의 위용이다.

 

 방촌 기념관

 

 

 

 

 

 

반구정과 황희정승 영당
반구정은 고려말에서 세종조에 이르기까지 장기간 임금을 보필하고 89세로 장수하였던 청백리 "황희정승 (1363~1452)"이 말년에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와 갈매기를 벗 삼아 지낸곳으로 임진강 하류의 절경 지역에 세워진 정자이다. 바로 윗쪽에 앙지대가 있다. 분단의 현실을 체감할 수 있는 철조망이 반구정 언덕과 임진강을 가로 막아 낙조가 들면 더없는 슬픔과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허목의 반구정기에 "조수때마다 백구가 강위로 몰려들어 모래사장 벌판에 가득하다" 고 하였다. 1452년 황희정승이 세상을 떠나자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방촌영당과 제사를 지내는 경모재가 구역 내에 있으며, 임진강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동상이 서 있다. 상주의 옥동서원과 장수의 창계서원에 제향되고 있으며, 황희 정승의 묘는 반구정에서 문산쪽으로 가다가 탄현면 금승리 산능선에 있다. 황희 정승은 좌천, 파직, 귀양살이 등을 당하면서도 60년간의 관직생활을 통해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고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를 돕는 등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갈매기를 벗 한다는 또 다른 정자인 압구정(狎鷗亭)은 세조때의 한명회가 자신의 호를 따서 한강변에 지은 정자였으나 정자는 없어지고 이름만 남아 압구정동이 되었고 지금의 현대아파트 11동 뒤편이 그자리였다고 한다.
황의 정승 일화
황희는 세종대왕을 보필하여 조선의 중흥기를 이끈 명재상이었다.
세종대왕을 도와서 중흥기를 이끌었으니 백성들의 칭송과 존경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수 다.
이러한 황희정승께는 역사적 사실외에도 많은 일화가 민간에 전해져 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1-소 두마리 중 어느소가 일을 더 잘하냐고 농부에게 물었던 이야기,
2-종들의 자식이 버릇없이 굴어도 다 받아주었다는 이야기,
3-세종대왕께서 황희정승의 집에 들렸는데 멍석에 누워있었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KBS역사스페셜의 세종대왕편을 참고하자면 실제의 황희는 지금의 파주지역의 땅이 거의 황희정승의 것이었을 정도로 부자였다고 합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처럼 빈궁하게 살지 않았다.
다만 황희가 청백리의 표상으로 불리우는 까닭은 후대의 권문세가처럼 넘치는 사치를 하며 자기자신의 부와 영달을 위해 산 것이 아니라 세종대왕과 , 당시의 수많은 훌륭한 신하들과 아울러 자기자신이 아닌 바로 백성을 위해 고민하고 노력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로부터 그같은 칭송을 듣고 다소 과장된 야사까지 생겨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반구정 [伴鷗亭]

반구정은 조선 세종 때 유명한 정승이었던 황희(1363∼1452)가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친구 삼아 여생을 보내시던 곳이다. 임진강 기슭에 세운 정자로 낙하진과 가깝게 있어 원래는 낙하정이라 불렀다. 반구정은 황희가 죽은 후 조상을 추모하는 전국의 선비들이 유적지로 보호하여 오다가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 버렸다. 그 뒤 이 근처의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복구해 오다가 1967년 크게 고쳐 지었다. 건물 규모는 앞면 2·옆면 2칸이며,기둥 윗부분과 옆면 등에 꽃무늬 장식을 돌려 붙였다.

 

 

 

 

 방촌 기념관과 반구정 관광을 끝내고 율곡 이이 선생의 자취를 찾어 나서기로 했다.

 

율곡 이이 [ 栗谷 李珥 ]
파주가 낳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
이곳은 조선 전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의 묘이다.
이이(李珥)는 중종(中宗) 31(1536)에 강릉 북평촌의 외가에서 출생하여 6세에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과 함께 서울 본가로 올라와 어머니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
명종(明宗) 3(1548) 13세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후 모두 아홉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
29
세에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처음 임명된 이후 황해감사, 대사헌(大司憲), 대제학(大提學), 호조(戶曹), 병조(兵曹),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미리 알아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였으며, 대동법(大同法)의 실시와 사회제도의 개혁에 노력하였다. 묘역은 부인 곡산 노씨(谷山盧氏)묘와 위아래로 인접해 있으며 봉분정면에 상석이 위치하며 오른쪽에 묘비가 있다
.
그 좌우로는 망주석과 문인석을 세웠다. 이이의 명성에 비해 소박하고 평범한 묘제 형식이다
.

 

 

 

화석정
율곡 선생의 본향 마을 율곡리 임진강변에 위치
율곡 이이(李珥)선생의 본향인 파평면 율곡리 임진강변에 위치한 화석정(花石亭)은 원래 고려말 대유학자인 길재(吉再)와 관련이 있다고 전해지나 자세한 문헌기록은 없다.

그후 세종 25(1443)에 율곡선생의 5대조부인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이 정자를 세운 것을 성종(成宗)9(1478) 선생의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보수하고 이숙함(李叔咸)이 화석정이라 이름지었다.


율곡선생은 국사의 여가가 날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여생을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보내면서 시와 학문을 논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칙사(勅使) 황홍헌(黃洪憲)이 찾아와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는 설도 있다.

임진왜란때 불타없어져 80여년간 터만 남아있는 것을 현종(顯宗)14(1673)에 율곡선생의 증손 이후지(李厚址)·이후방(李厚坊)이 다시세웠으나 한국전쟁때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화석정은 1966년 파주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한 것으로 건축 양식은 팔작지붕 겹처마에 초익공(初翼工) 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랐다
.

건물의 정면중앙에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쓴 '花石亭' 현판이 걸려있으며 내부 뒷면에는 율곡선생이 8세때 화석정에서 지었다는 『八歲賦詩』가 걸려있다
.

《 八 歲 賦 詩 》
林亭秋己晩 騷客意無窮  숲속정자에 가을이 이미깊으니 시인의 생각이 한이 없어라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먼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맞은 단풍은 햇빛받아 붉구나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는다
塞鴻何處去 聲斷暮 雲中 변방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저녁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소리

 

 

 

 

 

 

 

 

 

[배경음악: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