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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창덕궁 방문 [ 2008-09-04 ]

고향 길 2018. 2. 11. 16:43

오늘은 2008년 9월4일 목요일.

    늘 마음속으로 방문을 해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있던 창덕궁을 근 40년 만에 마침내 다시 찾게된 날이다.일상 생활에 쫒기다 보니 그리 만만한 일도 아니였고,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후, 1990년 ~ 1999년 까지는 대규모 복원 [ 돈화문 월대,낙선재일대,진선문,숙장문]작업으로, 무엇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고궁처럼 언제고 자유스럽게 방문할수 있는게 아니고 사전 예약을 하고 일정한 인원이 구성되여야 입장을 시키는 제도로 바뀐뒤로는 더더구나 찾어가기가 수월치 않은것도 이유중 하나였다.
그런데 오늘 목요일을 택해 아침 7시에 집을 나서 종로행 버스를 타고 혼자서 삼각대 없이 카메라만 들고 달려온 이유는 따로 있다. 아래 사진들 말미에 그 연유를 적도록 하겠다.
일차 사전 답사가 목적인 방문이 되였기에 가을 단풍계절에 다시 방문할 계획이다. 그때 우리 사사모 회원들 함께 갑시다.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 태종12]에 처음 지어졌다. 지금의 돈화문은 1609[ 광해군 원년에 ] 다시 지은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궁궐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敦化는 中庸 의 大德敦化에서 가져온 것으로 큰 덕은 백성등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이충문루에 종과 북이 있어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일본 단체관광객들이 앞서가고 있다. 저 관광객 보다 앞서야 인적없는 고궁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수 있을텐데... 

 눈치를 보아하니, 직진해 갈 모양이다. 나는 저기서 오른쪽에 있는 금천교를 넘어 가야겠댜.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면 나오는 중문()이다. 창덕궁 창건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1908년 인정전 개수공사 때 헐렸다가 1999년 복원공사를 완료하였다. 진선문을 들어서면 직사각형의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으며 마당에는 어로()가 나 있다. 마당 둘레에는 인정전으로 통하는 인정문 호위청·상서원 등의 행각이 있다. 백성의 억울함을 알리는 신문고 혹은 등문고라 불리는 북을 태종 때 진선문에 설치했고, 중간에 유명무실해졌다가 영조 때 다시 설치했다고 한다.

 멀리 인정문이 보인다.

 

 

 

 조선시대. 창덕궁의 공식 행사를 하던 인정전의 문으로 현재의 건물은 영조 21년에 건립한 것이나 1912년 인정전을 전시장으로 만들면서 벽체와 바닥의 구성이 변형되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통과하여 금천교 진선문을 지나면, 진선문 맞은편에 나오는 중문()이 숙장문이다. 숙장문과 진선문 사이에는 직사각형 마당이 있고, 마당을 빙 둘러 호위청·상서원 등의 행각을 비롯하여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인정문이 있다. 숙장문을 통과하면 내전으로 갈 수 있다. 숙장문은 성종 6년(1475) 좌찬성 서거정이 지어 올린 이름을 성종이 낙점하여 그때부터 사용된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 헐렸다가 1996년 시작된 복원공사를 통해 재건되었다

 殿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5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1804년(순조 4) 건립되었다. 남향이고 인정문과 함께 회랑으로 둘러싸여 일곽을 형성한다. 기단()은 2중으로 되어 있으며, 중앙과 좌우 측면에 석계()를 설치하고 바닥면에는 전석()을 깔았다. 상층기단 위에는 장대석()을 한 단 높여 돌리고 높은 주좌()의 초석()을 배열해서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배흘림이 없는 원주()이고, 내부에는 10개의 높은 기둥과 4개의 우고주()를 세워 중층가구법()을 따랐다. 두공(? )은 밖이 3출목()이고 안이 4출목인 다출목으로 전개되었으며, 기둥머리의 안초공()으로부터 살미와 첨차(? )의 세부수법이 조선 말기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가구()는 외중층() 내통층() 수법이고, 고주() 몸에 퇴량(退)을 끼워서 2층평주()를 받게 하였으며 우고주()가 2층 우주가 되게 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인데 각 마루에는 양성()하여 취두() ·용두() ·잡상()을 올려 놓았고 사래 끝에는 토수()를 끼웠다. 이 건물은 가구의 짜임새와 외관이 견실하면서 운치와 미려를 겸하여 흥선대원군 근정전(殿)을 재건할 때 이 건물을 규범으로 하였다.

 

 

 

 

 인정전에서 바라본 인정문과 관광객들의 모습이다.

 

 殿

임금이 평소 국사를 논의하던 편전이다.임금은 일월오악도를 배경으로 중앙에 앉고 그 좌우로 문관과 무관이 자리잡으며 한쪽에서는 사관[史官]이 앉어 국사에 대한 논의를 세세히 기록하였다. 사관들의 기록을 사초[史草]라고도 하며 이를 토대로 실록을 편찬하였다. 이 건물은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희정당 [熙政 堂]

임금의 침실이 딸린 편전이였는데, 나중에 어전회의실로 사용되였다. 1917년 대화재로 소실되여 지금의 건물은 1920년 경복궁의 강녕정을 옮겨지은 것이다.내부 응접실에는 서양식 기구가 놓여져 있다. 상방에는 해강 김규진이 그린 [금강산만물초승경도],[총석정절경도]가 걸려있다. 남행각 정문은 자동차가 드나들수 있도록 변형되였다.

 

 

 경훈각[景薰 閣 ]

처음에 2층 건물이였으며 아래층이 경훈각이고 윗층은 징광루였다. 1917년의 내전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920년 경복궁의 만경전을 헐어다가 단층으로 경훈각만 복원시킨 것인데 경훈이란 경광이 훈훈하다 라는 의미이다.
경훈각에는 선조가 명나라 신종에게서 받은 망의를 보관하였으며 명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의종의 어필을 새긴 편액이 걸려 있기도 하였다.

 

 

 

 천장문[天章 門]

천장이란 임금의 글 을 말한다. 천장문은 천장각이란 송나라 진종때 장서각[藏書閣]의 이름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천장각은 어집을 봉안하였던 곳이었다. 천장문을 통해 후원으로 들어가면 왕실 도서관 규장각이 있었으므로 아마도 천장문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 으로 추정해 볼수가 있다. 글씨는 전서체이다.

 

 

 

 

 

 

 낙선재[樂善齋]

낙선재,석복헌,수강재가 하나의 일곽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통칭하여 낙선재라 부른다.낙선재는 1847[헌종 13]지어졌다. 이곳은 마지막 황후인 윤황후[순정효황후]1966년까지 덕해옹주와 이방자 여사등이 1963년부터 1989년까지 거처하던 곳이다.아름다운 화계와 꽃담,다채로운 창살들이 돋보인다.

 

 

 

 

 

 

 

 

 

 

 

 

 

 

 

 

 

 

대조전[大造殿]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왕비의 침전인 서온돌과 임금의 침전인 동온돌로 나뉘어진다. 이 건물은 용마루가 없는데 이는 용으로 비유되는 임금이 잠자는 곳에 또 다른 용을 나타내는 용마루가 있으면 두 용이 충돌한다 하여 설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1917년 이 건물이 불에타자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을 옮겨다 지었다.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이 곳에서 승하하였다. 경운각은 대조전의 부속건물로 원래는 이층 건물이었으나 1917년 화재 이후 경복궁의 만경전을 헐어 단층으로 옮겨 지었다. 수라간은 음식을 만들던 곳으로 내부는 조선말 서양식으로 개조되었다.

 

 

 

 

 

 

 

 

 

 

 

 

 

 

 

 

 부용지를 향해 가는 길에서 잡은 그림이다.

 

 부용지[芙蓉池]와 부용정[芙蓉亭]

부용()’은 ‘연꽃’을 뜻하는데, 창덕궁 후원의 대표적인 방지()이다. 동서 길이가 34.5m, 남북 길이가 29.4m에 이르는 네모 반듯한 연못으로, 연못 중앙에 소나무를 심은 작은 섬이 하나 떠 있다.
네모난 연못과 둥근 섬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연못은 장대석으로 쌓아올렸고, 남쪽 모서리에는 물고기 조각이 하나 있다. 잉어 한 마리가 물 위로 튀어오르는 모습을 새겼는데, 이것은 왕과 신하의 관계를 물과 물고기에 빗댄 것이다

연못 남쪽에 위에서 봤을 때 열 십()자 모양을 이루는 정자가 있는데, 초석 2개가 연못에 들어가 있다. 이 정자는 원래 숙종 33년(1707)에 ‘택수재()’를 지었다가 정조 16년(1792)에 부용지를 고치면서 ‘부용정()’이라 불렀다.

연못 안에 팔각 석주를 세운 다음. 그 위에 목재를 얹어서 정면 5칸, 측면 4칸, 배면 3칸의 누각을 지었다. 연못을 향한 쪽마루에는 계자난간을 둘렀고, 반대편에는 평난간을 둘렀다. 정자 안은 네 개의 방을 배치했는데, 배면의 방이 다른 방들보다 한 단계 높다. 연못 쪽으로 난 창에는 완자살창을, 너머지에는 띠살창을 달았다. 창을 들쇠에 매달면 정자는 사방으로 트이게 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곳에서 왕이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 주연을 베풀고 축하해 주기도 했는데, 1795년 수원 화성을 다녀온 정조가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고 전한다. 사계절마다 변하는 주변 경치는 창덕궁 후원을 보는 이들에게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정조 즉위년(1776)에 지은 2층 건물인 주합루로 올라가는 문으로, 왕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신하들은 어수문 양 옆 협문으로 드나들었다. 주합루 아래층에는 조선왕실의 족보·서책을 보관하고, 경전과 역사를 토론하던 규장각이 있었다. 2층은 열람실 기능을 하였다. 어수문()은 말 그대로 ‘물고기와 물의 문’이라는 뜻으로 임금을 물에, 신하들을 물고기에 비유하여, 군신()은 서로 융화하는 관계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일주문 형태의 작은 문이지만 팔작지붕에 용조각을 치장하는 등 화려한 단청 장식이 돋보인다

 영화당[映花堂]

영황당은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현재 건물은 숙종 18[1692]에 재건한 것이다. 왕족의 휴식공간이자 이 건물의 앞마당인 춘당대에서는 친히 임금이 참석한 가운데 인재등용을 위한 과거를 실시하였다. 영화당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池 ,

조선시대 숙종 18년에 세워진 창덕궁 후원의 연못과 정자각으로, '애련'이란 명칭은 송나라 유학자 주돈이의 시 '애련설'에서 유래하였다.

 

 

 

 

 

 

정면 6칸, 측면 2칸, 단층팔작지붕집. 1828년(순조 28) 진장각() 옛터에 세워졌다. 사랑채와 안채 모두 납도리집 형식이고, 장설()도 생략되어 있다. 정간()은 넓고, 앞에는 좁은 툇간(退)이 놓여 있다. 문은 모두 2분합()이고, 대들보와 퇴량(退)의 높이는 모두 같으며 대들보 위에는 동자()기둥이 종량()을 받았다. 창덕궁에 있는 다른 건물이 단청을 한 데에 비해 연경당은 하지 않았다. 안채와 사랑채가 남향()하여 동서로 나란히 있어 딴채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채로 된 집이다. 매우 단촐하고 아담하여 조선시대 사대부의 집 형태를 잘 보여준다.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 정원 어귀에 있다. 임금이 옥류천의 어정()에서 약수를 마시고 돌아갈 때 잠시 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소박한 정자이다.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취한정에 대한 숙종과 정조의 시()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1720년 이전에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정면 3칸·측면 1칸 규모로, 팔작지붕을 올리고 납도리로 엮은 민도리집이다. 바닥에 마루를 깔고 난간을 둘렀으며, 처마는 홑처마이고 단청으로 치장했다.

 

 인조 14년(1636)에 세웠으며 탄서정()이라 부르다가 후에 소요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창덕궁 후원의 취한정 위쪽, 옥류천 바로 옆에 있다. 정자에 앉으면 옥류천과 소요암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정면 1칸·측면 1칸의 익공계 사모지붕 형식 정자이며, 계자난간을 둘렀다. 숙종·정조·순조 등이 이곳의 경치를 묘사한 시()를 남겼다. 옥류천변의 소요정·청의정·태극정은 상림삼정()이라 칭해졌다.

 

 

 

창덕궁 후원 북쪽의 깊은 골짜기에 있으며 인조 14년(1636)에 조성하였다. 북악산 동쪽 줄기에서 흐르는 물과 인조가 팠다고 알려진 어정()으로부터 계류가 흐른다. 소요암이라는 널찍한 바위에 U자형 홈을 파고, 샘물을 끌어 올린 다음 작은 폭포처럼 물이 떨어지게 만들었는데 임금은 이곳에서 신하들과 더불어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었다고 한다. 소요암에는 인조가 쓴 옥류천()이라는 글씨를 비롯하여 숙종이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청의정·소요정·태극정·농산정·취한정 등의 정자가 옥류천 옆에 있다.

 

창덕궁 후원 옥류천 주변에 있는 정자이다. 인조 14년(1636)에 세웠으며, 원래 운영정()이라 불렀다가 태극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굴도리를 엮은 정면 1칸·측면 1칸 크기의 겹처마 사각정자이다. 내부에 마루를 깔고 퇴를 달아 평난간을 둘렀다. 천정은 우물천정이고, 지붕 꼭대기는 절병통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정조의 ‘태극정시()’, 숙종의 ‘상림삼정기()’ 등 태극정을 노래한 어제()가 전해진다. 상림삼정이란 옥류천변의 소요정·청의정·태극정을 일컫는 말이다

 인간으로 부터 전혀 해꾸지를 당해본 경험이 없는 요놈이 겁없이 나를 꼬나보고 있다.

 

 

 池와 존덕정

창덕궁 후원에 있으며, 반월지라고도 부른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묘사한 조선 후기의 그림 <동궐도>를 보면 지금의 연못은 예전에 반달형과 직사각형 연못으로 분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존덕지 옆에는 또 다른 연못인 관람지가 있고, 존덕지에서 넘치는 물은 도랑을 따라 관람지로 흘러들어 간다. 연못가에 인조 22년(1644)에 세운 육각형 정자 존덕정()이 있다. 두 개의 주초석이 연못 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존덕정은 지붕이 두 겹이고, 천장에 황룡과 청룡이 그려져 있다. 정조가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라는 현판도 걸려 있다.

 

 

 

 옥류천까지의 관광을 끝내고 내려오는 길중 창덕궁 안벽을 좌로 끼고 우로는 가회동과 경계가 되는 바깥쪽 담벽을 끼고 내려오는 길을 택해 내려오면서 잡은 사진들이다.

 

 

 

 

 

아래 안내문을 보고 과연 몇사람이나 다음과 같은 의문사항을 풀수가 있겠는가?

 

1.자유관람일인 목요일에 사진을 찍기위한 삼각대는 갖이고 입궁할수 있는가?
2.기본 1시간에서 30분이 초과되여도 추가로 20,000원을 지불해야 되는가?
3.이렇게 과도한 요금을 받어야 되는 이유가 무었인가?
그런데 전화는 자동 응답으로 미리 입력된 사항 이외는 답을 들을수가 없다.
그래서 수색대원 처럼 나홀로 미리 정확한 정보를 얻기위해 직접 삼각대 없이 방문하게 된겄이다.
직접 직원과 대면하면서 얻은 답은 다음과 같다.
1. 삼각대는 갖이고 들어갈수 있다.
2. 15,000원 이외는 전혀 추가 요금은 없다.
3. 옥류천과, 낙선재,부용지도 별도 요금 없이 관람도 할수 있고, 사진 촬영도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