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1일.
우리 쌀 우리 농산물로 만든 가래떡을 나눠 먹고
초콜릿 과자를 선물하는 날로 아는 분들이 많지만
전 세계에서 자유와 평화와 희생과 헌신에
감사하는 바른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대한민국 부산을 향해 엄숙한 추모 묵념을
올리는 날이기도 합니다.
11월 11일 오전 11시.
전 세계가 2,300분의 한국전쟁 전몰장병이 안장된,
부산 남구의 유엔기념공원을 향해 1분 동안
추모 묵념을 합니다.
6·25 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전사자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대한민국과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다
소중한 생명을 바친 전사자들이 안장되어 있는
세계 유일의 유엔묘지를 향해 추모하자."
'턴 투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으로
불리는 이 행사는 캐나다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빈센트 커트니' 씨가 2007년 발의하여
매년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10년 이상 지속한
이 중요한 행사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도
관심도 적은 편입니다.
점점 잊히고 아픈 역사로만 기억하지 마시고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한 분들에 대해 감사함으로
함께 추모 묵념에 동참해 주세요.
- # 오늘의 명언
죽음도 불사하며 죽어간 용사들의 용기를
과소평가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 또한 용사들이 삶으로 보여준
용맹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존 F. 케네디 –
= 대한민국은 당신들의 희생을 절대 잊지 않겟습니다 = 부산 UN묘지에서 만난 위컴 장군 부부. 박선영
2019.10.24. 11:14
부산 UN묘지에서 만난 위컴 장군 부부 '미군은 전쟁에서도 이겨야 하지만, 주둔하는 곳의 거주민들 마음부터 헤아리고 어루만져야 한다'
내일(10/24)은 UN데이, 라고 말하면 요즘 학생들은 잘 모르더라구요. 저 어렸을 적엔 공휴일이었는데... 마침 부산에 간 김에 오전 강연 끝나고 오후 일정 사이, 점심시간에 UN공원에 들렀습니다. 점심은 매일 먹지만 부산엔 자주 못 오니까요. 게다가 오후 행사장이 마침 UN공원과 가까운 부경대여서 좋았지요. 사실 말이 '공원'이지 UN참전용사 2,300분이 계신 이곳은 그냥 '공동묘지' 라고 해야 할 정도로 아주 좁을 뿐만 아니라 규정도 매우 까다로워서 마음대로 다닐 수도 없습니다. 다행히 저를 알아봐 주신 분이 어떻게 왔느냐고 물으셔서 제가 존경하고 평소 친분도 깊었던 위컴 부부 묘에 참배드리고 싶다, 하니 별도로 안내해 주셔서 묵도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안내인의 도움 없이는 잔디밭을 밟고 들어가 이 나라를 위해 순직하신 외국 참전용사들의 묘소를 찬찬히 둘러 볼 수도 없습니다.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했던 위컴 장군, 끝까지 당신의 부하들을, 아니 부하의 유해를 하나라도 더 찾고 돌려받기 위해 자기 집조차 갖지 않으셨던 분. 이런 장군님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6.25 전쟁 중, 아주 추운 어느 겨울날, 부산에 큰 불이 나자 위컴 장군은 군수창고를 열어 부산시민과 피난민들에게 군사용 식량과 담요 등을 나눠줬습니다. 장군은 군형법상 Fire 됐고 미국 의회 청문회에 불려갔습니다. 그때 미 의회에서 그가 했던 말은 지금도 전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미군은 전쟁에서도 이겨야 하지만, 주둔하는 곳의 거주민들 마음부터 헤아리고 어루만져야 한다' 이 말에 추상같은 책임추궁을 늘어놓던 의원들이 전원 기립박수를 쳤고 그는 다시 군복을 입고 한국전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위컴 장군은 진정한 전쟁 영웅이었지요. 그러나 그 영웅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도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미군이 주둔했던 곳을 돌려주며 이승만 박사한테 '이곳엔 대학이 들어서면 좋겠다'고 해서 지금의 부산대학교가 되었고,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장진호 전투에서 두고 온 부하의 유해를 돌려받는 일을 했습니다. 그 일은 북미대화가 교착상태에 빠져있을 때도 계속됐지요.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국여성, 한묘숙씨와 결혼했습니다. 결혼하면서도 약속을 요구했고 유언으로도 남긴 말은 '내가 죽어도 내 부하의 유골을 수습하고 돌려받는 일을 끝까지 해달라'는 것. 그의 부인 한묘숙씨는 자신의 목숨이 다 하는 날까지, 자신의 모든 재산을 다 바쳐서 남편의 유언을 실천했습니다. 북한주민들은 길죽길죽한 뼈만 보면 한묘숙씨한테 보냈고 한묘숙씨는 그 뼈의 90% 이상이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 구당 300불씩 꼬박꼬박 지불했습니다. 가짜라고 안 주면 그 다음부터는 아예 안 가져올까봐. 그래서 그녀는 한국정부에 의해 간첩 누명까지 써야 하는 고초를 숱하게 겪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와이로 보낸 뼈 중엔 한국군으로 밝혀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한묘숙씨와 저는 가끔 만나 두 손을 부여잡고 참 많이도 같이 울었습니다. 오늘 흐린 하늘 아래 위컴 장군과 한묘숙씨의 작은 묘비 앞에 꿇어 앉아 있으려니 어이없이 흘러가는 이 나라의 정국이 한없이 부끄럽고 창피했습니다. 좁은 UN묘지 뒤로 하늘을 찌를듯이 도도하게 고급 아파트들은 솟아 있는데... 자그마한 조각상엔 We will never forget you brave sons 라고 써놓고 우린 지금 과연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있나요? 부끄러웠습니다. 창피했습니다. 낯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 햇빛은 없었지만 파람이 어찌나 강한지 눈을 뜰 수가 없어 선그라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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