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종로는 추억의 거리입니다. 60대 이상 선배들과 종로의 선술집에서 만나면
땡땡거리던 전차 이야기부터 시작됩니다. K 선배가 늘 선수를 치지요.
“쉰다섯 살 아래로 손 들어! 너흰 전차 귀경도 못했지, 불쌍한 것들.
오늘 이 자리는 두 부류로 나눈다. 전차를 타 본 사람과 못 타 본 사람으로.
” 그러고는 “일천구백육십사 년 서울로 이사와 중핵교를 댕길 때 늦잠을 자 부리나케 나간
날이면 막냇동생을 등에 업은 엄니가 보자기에 싼 ‘변또(도시락)’를 들고 달려와 전차를
멈춰 세우곤 하셨지. 돌아가신 우리 엄니가 엄청 보고 싶네. 자, 다들 한 잔해. 아니다,
전차 타 본 그룹만 한 잔” 하며 눈물을 쓱 닦곤 하지요.
눈치 없는 후배 M이 “트램(Tram) 말이죠? 노면 전차. 뭐 타 보진 않았지만…” 하고
잘난 척하려 들면 P 선배가 벌떡 일어나 “트램이고 나발이고 우리한테 그건 그냥 전차
인기라. 젊은 날의 추억이 가득한 381호 전차” 하며 노래를 시작합니다.
“밤 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강 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
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서울에서 전차가 사라진 1968년 발표된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입니다. 노랫말을
몰라 젓가락 장단만 맞추다 보면 “첫사랑 떠나간” 마지막 소절에서 첫사랑이 떠올랐
다며선배가 그녀의 이름과 함께 ‘르네상스’를 외칩니다. 푹신한 의자에 파묻혀
브람스 음악을 함께 들었던 그녀랍니다.
선배가 “르네상스는 당시 최고의 음악감상실이었지”라고 치켜세우면 어김없이
선배가 “쳇! 무슨 소리야. 음악감상실 하면 세시봉이지” 하고 반론을 제기합니다.
“클래식의 ‘클’자도 모르면서 겉멋만 들어 드나든 게 자랑이냐? 감미로운 통기타 소리
울리던 세시봉이 최고지.” L 선배가 그냥 있을 리 없습니다. “맞아. 술이나 한 잔해.
건배사는 이거야. 세시봉은 양아치, 르네상스는 신사!”
세시봉에도 르네상스에도 가 본 적이 없지만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1960~70
년대 종로의 모습이 흑백 영화처럼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문을 열면 자욱한 담배 연기
(당시엔 웬만하면실내 흡연이 다 허용됐을 것으로 생각함) 속에 올드 팝송이 흐르는
음악감상실, 양쪽으로 팔걸이가 있는 푹신한 패브릭 소파에 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연
인들, 엘피(LP)판을 틀어 놓고 ‘오늘은 왠지’로 시작하는 끈적끈적한 멘트를 날리며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디스크자키….
마포종점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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