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들 - 내 인생에 최고 최악의 순간 은산 정 광 남
나는 여기 그대로 머물고 싶은데 자연은 이를 허락해 주지를 않는구나. 얼 음속에 물 흐르는 소리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봄소식이 만개하여 문을 두두 린다. 나인들 그대로 머무를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기지개를 펴고 옥탑에 넣어둔 화분을 내 놓으려다 나 스스로가 놀라고 만다. 나는 오래전부터 느티나무 분재 한그루를 키우고 있다 회사를 사직하고 나와서 부터이니 한 15년은 족히 된 듯싶다 고향 길에 새싹을 얻어 화분에 심어놓고 처음에는 죽을까 봐서 애지중지 온갖 정성을 드려 키우다가 그것마저 귀찮은 생각에 헌신짝 버리듯이 처박아 놓은 지가 쾌 오래된 시간이다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만 살 수 있는 식물이 그 조그마한 화분의 척박한 땅에서 생명을 보존하여 자연의 순리에 따라 새싹을 피우고 있는 것이었다. 새삼스러이 신기한 생각이 들어 아주 쭈그리고 앉아 살피니 이제 막 피어나는 어린잎은 때 묻지 않은 순백의 영혼이요 어린아이 고사리 손 같이 앙증스럽고 예쁘고 아름다움에 탄성이 절로 나는 것이다 새 생명이란 이렇게 아름답고 신비로운 것인가? 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났을 가? 미안한 생각마저 든다. 걸음은 고사하고 물 한바가지 제대로 못 얻어먹고도 그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며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화분에 심어진 나무 한 그루를 보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한다. 과연 나는 내 몫을 하고 산 것일 가? 내 나이 60세에 자의로 사의를 표하고 나오기까지 30여년의 직장 생활은 구속된 영어(囹圄)의 몸에서 풀려나기라도 한 듯 하늘을 날을 것 같은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직장생활에 얽매어 하지 못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우선 여행이 하고 싶어 그 이튿날부터 여행 보따리를 싸들고 나선 것이 대한민국 곳곳에 거의 안가본데가 없을 정도며, 외국여행 또한 동서남북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이내 방향타를 잃어 타성에 젖은 역마살은 지금 까지도 시도 때도 없이 목적지도 정한 곳 없이 길로 나선다. 지금 생각하면 나 혼자 직장 생활을 한 것도 아니요 나 혼자 바쁘게 산 삶도 아닌데 세상을 혼자 짊어지고, 인생을 다 살은 양 착각 속에 잘못 선택한 항로는 돌이 킬 수 없는 잃어버린 15여년의 후회를 남긴다. 내 인생에 가장 후회스럽고 수치스러운 시간들이다. 스피노자의 격언이나,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기약 없는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자산어보(玆山魚譜)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남긴 정약전이나 정약용을 비유하지 않더라도 무엇이든 한 가지만이라도, 하루에 한 시간씩이라도, 시간을 내어 꾸준히 연마(練磨)해 왔다면 지금은 그 분야의 전문가요 달인이 되어 ‘제2의 인생’에 장인이 되어 있었을 것이며 지난 시간이 이렇게 후회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花요일아침예술학교 교장이신 홍문택 신부가 신문에 기고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86세로 우리 곁을 떠나신 김수환 추기경께서 칠순을 맞아 신부들과 조촐한 식사자리를 하시던 날 “막상 일흔 살이 되고 보니 죽음이라는 것이 두려운 것 같다” 고 하시면서 70년이라는 긴 세월이 주워 젖는데도 아직까지 여러 허물을 고치지 못한 채 살아온 게 아쉽게 느껴지고 앞으로 남은 시간에 얼마나 그 허물을 고치며 살 수 있을지 생각하니 두렵고 초조하다는 뜻이라고 하셨다⌟는 글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건강하게 오래 사는 장수의 미련보다 남은 생애 얼마나 많은 허물을 고치며 덕(德)을 쌓으며 살 수 있을 가 하고 고뇌하신 추기경님을 생각하며 자위(自慰)를 해본다. 나이가 들었음인지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허물이 늘어만 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다행스러운 것은 수필 창작 반에 청강을 하면서 글을 쓴다고 책도 읽어 보게 되고 그 과정에 생각도 해보고 나를 돌이켜 거울에 비추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무엇보다도 별빛문학회를 지도하여 주시는 선생님과 문우님들의 좋으신 인품에서 묻어나는 은은한 향기를 느껴 볼 수 있다는 것이 더 할 수 없는 기쁜 일이다
글을 쓴다면 얼마나 글을 쓰겠는가 생각한다. 글을 써 보겠다고 책상머리에 앉아 나를 비추어 보는 것 그 자체가 나는 더 없이 즐겁고 행복 한 것이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내가 쓴 글을 책으로 엮어 부모가 살 고간 모습을 남겨주고 싶은 것이다. 후일 그런 시간이 내게 주어진다면 그 시간이 내 생애의 최고의 시간이 될 것이다
아무렇게나 처박아 놓았던 분재가 내게 좋은 교훈을 안겨준 것이다. 연(緣)을 쉽게 만 들일도 아니지만 만든 연은 책임도 질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면 갈수록 고개가 숙여지는 일뿐이다 이제라도 내 몫을 하고 살 수 있도록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며 최고의 시간이 주어지도록 노력해 보자고 다짐을 해본다. 2015. 3.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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