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陵
조선왕조 제4대 임금인 세종과 왕비 소헌왕후 심씨(沈氏)의
능위치 : 사적 제195호.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원래 영릉은 소헌왕후가 죽은 1446년(세종 28) 광주(廣州) 헌릉 서쪽에 조성하여 그 우실(右室)을 왕의 수릉(壽陵)으로 삼았다가 1450년 왕이 죽자 합장했다. 세조 때 이 영릉이 불길하다는 의논이 대두했으나 서거정(徐居正)이 "천장(遷葬)함은 복을 얻기 위함인데 왕자가 다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라고 반대하여 옮기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 여주로 옮기게 되었다.
믿거나 말거나
본래 효자였던 세종은 자신의 능지(陵地)를 서울 강남구 내곡동 대모산에 있는 아버지 태종의 현릉 서쪽에 자리를 잡았고, 현재의 영릉자리에는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 1395~1463)과 대제학을 지낸 이계전(李季甸 1404~1459)의 묘가 있었다. 이인손운 둔촌(遁村) 이집(李集1327~1387) 선생의 손자인데 이인손이 죽으면서 내 묘소애는 재실을 짓지 말고 묘소 오는 길에는 다리를 놓지 말라고 유언을 하였는데, 자식들이 우의정을 지낸 아버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또한 자신들의 벼슬에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 재실과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예종 즉위년(1468) 상지관(相地官) 안효례(安孝禮)가 "영릉이 앉은 좌국이 풍수지리상 옛 법에 맞지 않아서 좋지 않은 일들이 연달아 생기니 다른 곳으로 옮겨서 큰 복을 받도록 해야 한다." 라고 아뢰었다. 이에 예종은 마땅한 자리를 찾기 위하여 신하들을 2명씩 짝을 지워 천장(遷葬)할 장소를 찾게 되었는데 그 지관 일행 가운데 노사신과 안효례가 여주의 강금산을 거쳐 북성산에 이르러 지세를 살펴보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예종은 당시 평안도 관찰사로 가있는 이인손의 맏아들 이극배(李克培1422~1495, 후에 영의정)을 불러들여 왕의 은근한 뜻을 비치니, 이극배는 아우들을 불러 상의하여 할 수 없이 아버지 이인손의 묘를 이장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 세종의 영릉을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세상 사랍들은 이인손의 유언대로 다리를 놓지 않았더라면 지관들이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고,재실이 없었으면 그 곳에서 비를 피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천하 명당인 아버지의 묘소를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고 그래서 그런지 이들 3부자 정승이후에 광주이씨 문중은 그 문중세가 전에만 같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위 사진은 구원회 동창이 찍어준 사진이다.
단체 사진으로는 얼굴을 제대로 볼수가 없어 3등분으로 나누어 찍은 사진이다.
영릉의 자원봉사 안내자는 활기찬 여성으로 카메라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열심히 설명을 해주고 있다.
李 여사님, 몰래 카메라 알지요? 미안 합니다. 설마 초상권 문제로 송사야 있을까...
30여년전 와보고 오늘이 두번째 방문이 되겠는데, 새삼 놀라게 되는건 세종대왕은 한글창제뿐 아니라 위대한 과학자였다는 사실이다. 영릉 방문 기록을 1, 2편으로 나누었는데, 2편에 대왕께서 발명하신 발명품들을 별도로 올렸다.
세계에서 글자를 수출해 그 나라의 글이되게한 국가는 대한민국이 유일한 나라가 아닐까 ! KBS 2 TV 미수다 [ 미인들의 수다 ]에 나오는 각국의 미인들이 그 간편성과 과학성을 이구동성으로 찬탄 하는게 바로 한글이다. 핸드 폰의 문자 메세지로는 한글과 비견할수 있는 문자가 없고, 타이핑도 그 속도에 버금갈 나라 글이 없다고 한다. 미인들 상호간 주고 받는 문자 메세지도 전부 한글을 사용하고 있단다.
요 깜직한 새싹들 중에, 대통령도, 위대한 예능인도, 세계 굴지의 사업가도 있을거니 어이 한 순간이라도 소홀이 다룰수 있겠는가!
홍살문[紅-門]
능, 원, 묘, 궁전, 관아 따위의 정면 앞에 세우던 붉은 칠을 한 문. 홍전문이라고도 한다. 9m 이상 되는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 없이 붉은 살을 박아 놓았는데, 그 중간에는 태극 문양을 그려 넣었다. 위 사진은 홍살문앞에 있는 금천교 설명을 열심히 듣고있는 장면이다.
있는 힘을 다해 달리는 모습이 하도 귀여워 한장 찰깍 !
위 그림에서 정자각을 향한 길이 좌,우, 중으로 3분 되여 있는데, 중앙의 큰길은 이용할수 없고, 좌,우 두 길은 영의정을 비롯한 신하들이 文은 文끼리, 武는 武끼리 從을 이루어 최상의 예를 갖추어 조심스럽게 걸었던 길이라고 한다.
전주 이씨 왕족의 후손인 이진수 회장이 동창을 대표해 홍살문을 통과하기전 4拜를 하기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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