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추억 만들기

09년 동창회 단풍맞이 야유회 - 명성황후 기념관 - 1 [ 2009-10-18 ]

고향 길 2018. 1. 4. 09:41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天高馬肥, 五穀百果 수확의 계절 10월, 16일을 택해 동창회 단풍맞이 나들이가 이루어 젔다. 관광버스 2대에 80여명의 백전노장, 백발의 노신사,숙녀들이 뭉쳐 추억 만들기에 들어갔다. 장소는 아래 그림에 보다싶이 경기도 여주군과 이천시가 되였다. 여주군에서는 명성황후 생가와 세종대왕이 잠드신 英陵, 천년이 넘는 古刹 神勒寺, 불교 목각 박물관인 목아박물관, 마지막으로 이천시에서 온천수로 피로를 풀고, 이천쌀밥으로 저녁식사하는 거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개 요

쇄국정책을 펴던 흥선대원군을 하야시키고 개국을 단행했다. 1882년 임오군란 후 청의 세력에 의존했으나,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한 후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했다. 국내정치에서는 민씨척족을 기용하여 세도정권을 행했으며, 일련의 점진적인 개화시책을 통해 급진개화파의 개화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성장과정과 집권배경
본관은 여흥.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의 외동딸이다. 8세 때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1866년(고종 3) 3월, 16세 때 부대부인 민씨(府大夫人閔氏)의 추천으로 왕비가 되었다. 고종의 사랑을 그다지 받지 못했고, 1871년 자신이 낳은 첫번째 왕자를 5일 만에 잃는 등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대원군과의 불화는, 대원군이 고종의 총애를 받던 궁인 이씨 소생의 완화군(完和君)을 세자로 책봉하려 한 데서 시작되었는데, 명성황후의 배후에는 민승호 등 여흥민씨 삼방파(三房派) 세력을 비롯해 조대비(趙大妃)를 중심으로 한 풍양조씨(豊壤趙氏) 세력, 대원군에게 무시된 대원군 문중 내부의 세력, 그리고 대원군 정책에 반대하는 유림세력 등 노론을 중심으로 하는 반(反)대원군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대원군이 당쟁을 근절한다는 명분 아래 등용한 남인 중심의 세력과 정치적 갈등을 빚고 있었다. 1873년(고종 10) 반대원군 세력을 규합한 명성황후는 앞서 대원군을 탄핵한 바 있는 최익현을 동부승지로 삼고, 그해 10월 26일 그로 하여금 대원군의 실정(失政)을 들어 탄핵하고 고종의 친정(親政)을 요구하는 소(疏)를 올리게 했다. 이때 조정의 의견이 서로 달랐지만 그녀는 최익현을 감싸고, 그를 호조참판으로 승진시켰다. 최익현은 11월에 다시 상소를 올리고, 대원군은 양주 곧은골[直谷]로 물러나게 되었다.

 

집권과 대외정책
명성황후는 대원군 실각 후 민씨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정책을 시행했다. 먼저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를 우의정에 등용하고,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과 부산훈도 안동준(安東晙), 경상도관찰사 김세호(金世鎬)를 차례로 파면·유배했다. 개화를 위해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삼군부(三軍府)를 폐지했으며,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청에 파견하여 신식무기·공업 등을 학습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조선책략〉의 연미론(聯美論)이 유포되자 1881년 김윤식이 영선사로 청에 갈 때 밀명을 내려 청에 한미수교를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고, 또한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에 보내어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대미수교의 주선을 요청하기도 했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여 고종과 비밀리에 연락하는 한편, 청에 군대를 요청하여 임오군란 후 집권했던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게 한 뒤 정국을 다시 장악했다. 그녀를 비롯한 민씨척족은 이때부터 친청사대(親淸事大)로 기울었고, 개화파의 급진적인 움직임에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다. 1884년(고종 21) 김옥균·박영효 등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자, 다시 청의 도움으로 이들을 제거했다. 1885년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한 영국이 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을 일으키자, 묄렌도르프를 통해 영국과 교섭하는 한편 러시아와도 접촉했다. 이에 청과 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대원군의 환국을 주선하여 민씨척족 세력과 정권다툼을 벌이도록 유도했는데,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그 여세를 몰아 조선 정계에 압력을 가해오자 그녀는 친러시아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일본에 대항했다. 더욱이 3국간섭으로 일본의 대륙침략 기세가 꺾이자, 러시아의 힘을 과신하여 친러경향을 더욱 굳혔다. 1895년(고종 32)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일본의 조선병합에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던 명성황후와 그 척족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김홍집 내각의 일부 세력과 대원군 세력, 그리고 해산하기로 예정된 훈련대와 일본 정치낭인으로 하여금 황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학살하게 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옥호루(玉壺樓)에서 살해된 뒤 황궁 밖의 송림에서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그녀는 곧이어 세워진 친일정권에 의해 폐비되었으나 곧 복위되었고, 국체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뒤 명성황후로 추책(追冊)되었다. 세간에 알려진 '민비'라는 이름은 고종이 황제에 등극하기 전 호칭으로 성씨인 민씨와 조선시대 왕의 부인인 왕비를 축약해 부르는 용어이며, 시해된 후 고종이 황제가 되자 여기에 맞춰 황후로 격상되었다. 경기도 양주 숙릉(肅陵)에 묻혔고, 1897년 청량리 홍릉(洪陵)으로 이장되었다. 1919년 고종이 죽은 뒤 다시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 홍릉으로 이장되었다.

 

 버스에서 내려 명성황후 생가를 향해 가고들 있다. 책가방을 옆에 끼고 등교 중인 학생들 모습과 교차되며 애잔한 추억의 그림움으로 잠시 빠저들게 한다.

 명성황후 생가

위 치 :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250-2

조선 제26대 고종 황제의 비로 개화기에 뛰어난 외교력으로 자주성을 지키면서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시다 1895년 10월 8 새벽 일본인에 의해 시해당하여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던 명성황후가 출생하여 8세까지 살던 집이다. 1687(숙종 13) 왕의 장인 민유중의 묘막(墓幕) 으로 건립되었는데 당시 건물로서 남아있는 것은 안채 뿐이었으나, 1995년에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복원됨으로써 면모가 일신되었으며,명성 황후가 어렸을 때 공부했다는 방이 있었던 자리에 탄생을 기념해 세운 "명성황후 탄강구리(明成皇后 誕降舊里)" <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이라 새겨진 비가 세워져 있다.


 금년 동창회 야유회를 책임지고 기획, 추친한 李鎭洙 회장의 모습이다. 금년 스승의 날 5월에는 연락가능한 선생님들을 모시고 성대한 사은회도 성공시킨 올곧은 동창이다. 감사 합니다.

 모처럼 만나 주고 받을 새소식들이 많은듯, 표정이 사뭇 심각해 보인다 ! 마님들, 천천히 실타래 풀듯 서둘지 마시고...

 2009년 10월16일 이날의 동창들  모습들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가급적 많은 장면을 담으려 노력했다.

 

 

 

 가이드를 해주신 여성분의 간곡한 부탁으로 그 분의 사진은 찍지 못했고, 그분의 설명에 진지하게 경청하고있는 모범생들의 모습이다.

 

 

 

 

 

 

 명성황후가 유년시절 이방에서 글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옥쇄 !


 

 


위 그림에서는 시해 장소가 황후의 침첨에서 일본 낭인들의 만행이 이루어 진거로 묘사되여있는데... 

명성황후 시해 장소의 진실은 아래 그림과 같읍니다. 

소위 여우사냥이라고 불리던 을미사변,위 그림에서 보다시피,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곤령함 뜰로 끌고나와 칼로 몇번 찔러 시해한뒤 불태워 없앴다 라고 기록이 남아있죠

 

 

 

 

 

 

 

 

 

 

 

 

 

 

 

 

 

 

 

 

 

 

 

 

 

 

 

 

 

 

 

 

 

 

 

 

 우리 나라를 이끌어 나갈 새싹들이 노라케 물든 은행나무 아래에서 놀고들 있다.

 이진수 회장이 다음 방문지에 대하여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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