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을 지나 흥례문 광장에서 흥례문을 바라보며...
흥례문(興禮門) 흥례문(興禮門)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원래는 1426년(세종 8년)에 집현전에서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으로 이름을 지어올렸는데,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휘 홍력(弘曆)을 피하여 지금의 흥례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흥례문 중앙에서 경복궁 안쪽을 들여다보면 영제교를 지나 근정문, 근정전이 차례로 일자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근정전[勤正殿] 경복궁의 정전(正殿). 국보 제223호. 1395년(태조 4) 지은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현재의 건물은 1867년 중건된 것이다. 2층의 목조건물로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던 곳이다. 근정전은 이단으로 된 월대(月臺) 위에 자리하며, 월대 주위의 돌난간에 새겨진 12지상(十二支像)은 정전 수호의 의미가 있다. 월대의 주위를 둘러싼 회랑은 홍례문의 좌우에서 시작해 향오문의 좌우로 연결되면서 근정문(勤政門)과
건청궁[乾淸宮] 경복궁 안 향원정 북쪽, 궁궐에서 가장 깊숙한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건청궁은 명성황후께서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를 당한 비운의 장소이다. 1895년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건청궁 안의 곤녕합(坤寧閤)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하여 시신을 옥호루(玉壺樓)에 잠시 안치하였다가 건청궁의 뒷산인 녹산에서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건청궁은 고종 10년(1873)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체제를 구축하고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내탕금(왕의 사비)를 들여 세웠는데 1884년부터 이곳에 기거하면서 정무를 처리하므로서 신문물을 수용하고 근대화를 도모한 산실로서의 의미가 있는 건물이다. 건청궁은 왕의 처소인 장안당(長安堂), 왕비의 처소인 곤령합(坤寧閤), 별채인 복수당(福綏堂)의 세 부분으로 나뉘고 서재인 관문각(觀文閣)이 있었는데 건청궁은 1909년에 헐린 후 1939년 미술관이 들어섰고, 민속박물관으로 쓰이다가 다시 헐렸는데 2007년에 관문각을 제외한 나머지 전각들을 복원했다. 건청궁 앞에는 네모난 모양의 향원지와 향원정이 있다. 원래는 건청궁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북쪽에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파괴된 후 지금처럼 남쪽으로 놓았다. 그리고 건청궁에 전기를 사용하기 위해 1887년 국내 최초로 전기가 가설되었다.
취향교(醉香橋)
향원정[香遠亭] 향원정은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그 앞에 연못을 파서 연못 가운데에 섬을 만들어 2층의 육모지붕을 얹은 정자이다. 향원정으로 가는 섬에는 나무로 구름다리를 만들어 취향교라 하였다.
교태전[交泰殿] 경복궁 안에 있던 왕비의 침전(寢殿). 경복궁 창건 당시인 1395년(태조 4)에는 없었으나 1443년(세종 25)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1553년(명종 8) 불탄 것을 이듬해 중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다시 불타버렸다. 1865년(고종 2)에 중건되었는데, 1876년 다시 불탄 것을 1888년 재건했다. 1920년 창덕궁 대조전을 짓는다는 구실로 왕의 침전인 강녕전과 함께 일본인들에 의해서 헐려 건축부재로 사용되었다. 현재 이 자리에는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강제로 옮겨온 석탑·부도 등의 석조물들이 있다. 교태전은 뒤뜰의 아미산에 남아 있는 굴뚝에 새겨진 십장생·매란국죽과 길상(吉祥)의 무늬로 보아 150여 채의 궁궐건물 가운데 가장 화려하게 치장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蹟圖譜〉에 1920년 당시의 사진과 평면도가 실려 있어 원형추정이 가능하다.
경회루(慶會樓) 경회루는 침전영역 서쪽에 위치한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이다. 외국사신의 접대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벌어지는 연회장소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경복궁 창건 당시는 작은 누각이었던 것을 태종 12년(1412)에 크게 연못을 파고 지금과 같은 규모로 만들었다. 그 후 성종 때 건물이 기울어져 다시 고쳐 지었는데 돌기둥에 용과 꽃 장식을 하여 화려하게 치장하고, 연산군 때에는 연못 안 인공섬에 만세산을 조성하고, 그 곳에 월궁을 꾸며 조화를 장식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 경회루건물은 없어졌지만,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연못은 나라에 가뭄이 들 때마다 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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