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 : 아홉 구
鼎 : 솥 정
大 : 큰 대
呂 : 음률 려
구정(九鼎)과 대려(大呂)가 합쳐진 말로, 구정은 고대 중국 하(夏)나라 우(禹)임금이 아홉 개의 주(州)에서 금을 거두어 주조한 큰 솥으로 하·상(商)·주(周)나라 이래로 천자에게 전해져 국가의 정권을 상징하는 보물로 받들어 졌다. 대려는 주나라 때부터 사용된 음률명(音律名)이자 큰 종(鐘)의 이름으로, 구정과 더불어 주나라 왕실의 보기(寶器)로서 귀중하게 여겨졌다. 구정대려는 다음 《사기(史記)》 <평원군열전(平原君列傳)>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나라에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재상을 세 번 지낸 인물로 그를 찾는 빈객만 수천에 이르렀다. 어느 날 진(秦)나라에게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당하자, 조나라 왕은 평원군에게 초(楚)나라에 가서 합종(合從)을 요청하라고 하면서 문하의 식객 20명을 동행하도록 하였다. 평원군은 자신의 문하에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들이 많았기에 자기 사람으로만 채우기에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결국 19명을 뽑고 한 명이 모자라게 되었다. 그 때 모수(毛遂)라는 자가 나와 평원에게 스스로를 추천하며 뽑아달라고 하였다. 평원군은 모수가 자신의 문하에 3년이나 있었으면서도 자기가 알지 못하니, 그가 자루 속의 송곳처럼 절로 드러날 만큼의 인재가 아닌 것이라며 거절했다. 하지만 모수의 계속된 간곡한 청에 결국 마지막 20번째 인원으로 데리고 갔다. 19명의 빈객은 처음에는 모수를 비웃었다가 초나라까지 가는 길에 모수의 견해를 들은 후에는 그의 식견에 탄복하였다.
초나라에 도착하여 평원군은 초왕과 합종을 논의하였으나 날이 새도록 타결을 짓지 못하였다. 이에 모수가 나서서 결정을 내릴 묘안을 제시하기 위해 초왕과 평원군의 자리에 나아가자, 일개 빈객이 당돌하게 나섰다며 초왕은 크게 노했다. 그러나 모수는 손에 쥔 칼자루를 더욱 꽉 쥐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가 초나라 땅이라도 지금 10보 안이라면 왕의 목숨은 제 손에 달려 있습니다. 저의 주군이 앞에 계신데 어찌 꾸짖는단 말입니까? 옛날 탕왕(湯王), 문왕(文王)은 아주 작은 땅으로도 천하의 왕이 되었으니, 군사가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대세를 잘 파악해 위세를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초나라는 사방 5천 리에 병사가 백만이니 초의 강력함은 천하가 당해낼 수 없습니다. 합종은 초를 위한 것이지 조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초왕은 모수의 말에 설득되어 결국 합종을 받아들였다.
합종이 결정되고 평원군은 조나라로 돌아가 모수와 같은 인재를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안목을 반성하며 이렇게 말했다. "모수 선생이 한 번 초나라에 가서 조나라를 구정(九鼎)과 대려(大呂)보다도 무겁게 만들었소. 모수 선생의 세 치의 혀가 100만 군사보다 강했소이다. 이 조승은 감히 다시는 인재를 고르지 않을 것이오[毛先生一至楚, 而使趙重於九鼎大呂. 毛先生以三寸之舌, 彊於百萬之師]." 그리고 마침내 모수를 상객으로 삼았다.
강대국인 초나라 앞에서 굴하지 않고 자신 있게 설득력 있는 말로 조나라의 지위를 한층 높게 만든 모수에 감탄한 것이었다. 이 고사에서처럼 구정대려는 한 나라의 권력이나 지위, 정권을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구정대려 [九鼎大呂]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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