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반도를 가다

773년 전 크로아티아를 뒤집어놓은 몽골騎馬군단 이야기 / 조갑제(趙甲濟)

고향 길 2018. 8. 21. 11:30


773년 전 크로아티아를 뒤집어놓은 몽골騎馬군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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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아海의 진주’ 두브로브니크 풍경./조갑제닷컴

요사이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 가는 곳이 크로아티아이다. 아드리아海를 끼고 이탈리아와 對面하는 이 지역은 옛날부터 그리스, 로마, 베니스, 헝가리, 오스만 터키, 오스트리아 문명권에 속했다. 달마티아 지방으로 불리기도 한다.

   나는 지난 週 이 지역을 여행하다가 1240년 러시아 남쪽에서 發進한 징기스칸 손자 바투의 몽골 기마군단이 아드리아해의 크로아티아 지역까지 쳐들어와 초토화시킨 이야기들을, 현지인들로부터 많이 들었다. 몽골인들에 대한 공포심과 외경심은 지금까지도 크로아티아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다. 비슷하게 생긴 韓中日 관광객이 이 지역을 뒤덮고 있다. 다른 모습의 몽골 침략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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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 칸의 손자 바투 칸.
   1241년 봄 몽골군에 의하여 헝가리 군대가 전멸당하자 왕 벨라 4세는 아드리아 해안으로 도망 갔다. 당시 크로아티아 왕국은 헝가리 왕국과 연합국 개념의 동맹 관계였다. 바투가 2만 명의 별동대를 크로아티아로 보낸 것은 정복이 아니라 벨라 4세 체포였다.

   몽골군단은 아드리아 해안 지역인 달마티아(가장 유명한 도시가 두브로브니크)를 쓸고 다니면서 왕을 찾았다. 이곳 귀족들이 왕을 숨겨주었다.
 
   이틀 전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로 갔더니 여자 가이드가 몽골군이 그곳을 파괴한 이야기를 했다. 약 800년 전 눈이 작게 찢어진 몽골군이 몰려와 성당을 불태우고 성곽을 부순 뒤 자그레브가 재건된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 사건이 도시의 번영을 가져오는 轉禍爲福의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벨라 4세는 도시 再建을 위하여 자그레브 시민들에게 勅令을 내려 '왕실 직할 도시'로 지정, 많은 자치권을 주었던 것이다. 
  
   몽골군이 자그레브나 헝가리 쪽에서 아드리아해로 넘어오려면 디나르 산맥을 지나야 한다. 해발 2000m급의 험준한 山嶽이다. 여기서 크로아티아군으로부터 매복 공격을 받아 고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2차 대전 때는 크로아티아 출신 티토가 이 산악 지대를 무대로, 게릴라 부대를 지휘, 나치 점령군과 싸웠다. 2차 대전의 가장 성공적인 게릴라전이었다. 티토는 그런 힘으로 스탈린을 거역하고, 세르비아 사람들을 누르면서,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지도, 自主노선을 걸을 수 있었다. 냉전 후 유고연방이 붕괴되고 內戰이 일어난 한 이유는 티토와 같은 카리스마 강한 지도자가 사라진 때문이다. 
  

    몽골군대는 1260년대엔 이집트의 맘루크 왕국이 다스리던 시리아, 이스라엘까지 진격하는데, 몽골군의 서양 원정은 지금까지도 깨어지지 않은 最長의 작전이다.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러시아 원정보다도 몽골에서 시작, 아드리아해와 갈릴리 호수까지 간 원정의 범위가 더 넓다. 말과 활, 그리고 野性과 조직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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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헝가리의 무히 決戰場에서
  
    기자는 1996년 6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서쪽으로 유명한 戰跡地(전적지)인 무히까지 자동차 편으로 달려 본 적이 있다. 부다페스트를 빠져나가자마자 大平原(대평원)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밀밭 보리밭 과수원 草原은 기자가 거쳐온 몽골 벨트 지역에서 이미 눈에 익은 장면이었다. 헝가리는 몽골-투르크族의 캔버스인 유라시아 草原의 서쪽 끝이다. 동쪽 끝은 만주-한반도이다. 
   
   1241년 겨울 징기스칸의 손자 바투는 20년 전에 러시아 원정을 한 적이 있는 老將(노장) 스부데이를 사령관으로 삼아 우크라이나 서쪽에 10만 기마군단을 집결시켰다. 영국 戰史학자 리델 하트에 따르면 이 원정의 목표는 헝가리였다. 당시 헝가리 지배층은 몽골-투르크族 계통의 마자르族이었고, 몽골 제국에선 헝가리를 자신들의 통치권 바깥에 있는 유일한 同族(동족) 집단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결전장 무히까지 3시간 동안 달리면서 기자는 몽골 군대가 비록 유라시아 草原의 동쪽 끝에서 왔다고 해도 헝가리 草原에서 크게 이질감이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으리라는 상상을 할 수 있었다. 초원은 바다와 같아서 어디를 가나 비슷한 분위기와 생활 양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바다를 지배하여 제국을 건설할 수는 있어도 바다에 제국을 세울 수는 없는 것과 꼭같이 이 북방 초원은 문명과 종교와 상품과 과학과 기술이 매개되는, 또 권력과 국가가 만들어지는 무대이자 産室(산실)이었지 어떤 국가나 이념의 틀에 속박 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아니었다. 

   
   15세기부터 大항해 시대가 시작되어 비로소 大洋(대양)이 제국의 고속도로 역할을 하기 전까지 세계사에는 두 개의 진정한 바다가 있었으니 하나는 지중해요 다른 하나는 유라시아 草原이었다. 지중해가 그리스-로마 문명으로 상징되는 서양사의 무대였다면 유라시아 草原은 몽골-투르크 기마군단으로 상징되는 군사력, 권력, 파괴와 창조, 그리고 무역과 문화의 교류로 상징되는 동서양 통합의 무대였다.

     먹물 먹은 지식인이 독점하고 있는 역사 기술은 필연적으로 지식, 즉 문명과 예술을 최고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더구나 근대 역사학의 방법론이 서양에서 개발된 관계도 있고 해서 세계사는 일방적으로 서양 중심으로 써졌다. 훈, 투르크, 몽골族의 西進(서진)에 의한 피해를 많이 보아온 西歐(서구)학자들에게 객관적 기술을 기대할 수도 없는 일. 이렇게 되어 몽골-투르크族은 야만족 취급을 받아 과소평가를 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세계사를 자동차에 비교한다면 유라시아 초원은 그것을 움직이는 트랜스미션이었고 몽골-투르크族은 트랜스미션을 돌리는 엔진이었다. 이 엔진으로 해서 세계사는 빨라졌고 넓어졌으며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무히에 도착했다. 풀밭 가운데 작은 동산이 있고 나무 십자가가 수십 개 꽂혀 있었다. 무히 大會戰(대회전) 750주년을 맞은 1991년에 세운 「무히 전투 기념물」이다. 패전을 기념하는 건축물답게 참담하고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몽골族에 대한 원한처럼 느껴졌다. 사조 강변(江邊)에 자리잡은 이 무히 전투에 대하여 기념관에선 이렇게 적어놓고 있었다.
  
   <타타르(몽골族을 지칭)는 헝가리 군대 집결지를 향해 활을 쏘기 시작했다. 타타르의 화살은 멀리서 날아오는데 헝가리의 활은 짧게 날아 敵陣에 이르지 못하니 절망, 무력감, 그리고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도망자가 속출하게 되었다.>
  
   이 기념물에 또 이런 비명이 새겨져 있다.

   <헝가리와 다른 나라에서 참전한 기사들은 헝가리 왕과 함께 야만族으로부터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여기에서 목숨을 바쳤다.> 
   
   바투와 스부데이에 의한 헝가리 정복전쟁은 20세기의 기갑부대에 의한 大기동전을 방불케 하는 규모와 속도로 진행되었다. 몽골軍은 4개 군단으로 갈라진 다음 부챗살처럼 서쪽으로 질주하기 시작하였다. 맨 먼저 출발한 것은 진행 방향으로 봐서 맨 오른쪽인 北軍(북군)이었다. 이 군단은 主力軍(주력군)이 되는 나머지 3개 군단을 엄호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1241년 3월 폴란드로 쳐들어간 北軍은 비스롤라江을 건너 스지들로우에서 폴란드 군대를 격파하였다. 4월에는 리그니츠에서 폴란드-독일 연합군을 大破(대파)했다. 
   
   한 달 만에 北軍은 두 번의 결정적 승리를 통해서 폴란드와 지금의 체코 지역을 정복했다. 약 600km를 한 달만에 주파한 北軍은 主力軍의 헝가리 정복전을 안전하게 감싸안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3개 군단으로 구성된 주력군은 左軍(좌군)과 右軍(우군)이 원호를 그리면서 먼저 뻗어나가고 그 방어선의 한 가운데로 중앙군이 직선으로 질주하는 작전을 폈다. 이 3개 군단은 4월4일 부다페스트 부근 다뉴브 강변에 집결했다. 중앙군의 선봉은 3일 만에 눈덮인 敵國(적국) 지역을 300km나 돌파하는 기록을 남겼다. 바투와 스부데이는 여기서 전략적 후퇴를 하게 된다. 다뉴브강을 건너서 헝가리 군대와 결전하는 것은 무리일 뿐만 아니라 몽골 기마군단의 長技를 살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약 8만의 몽골군이 6일간에 걸쳐 천천히 후퇴를 하니 헝가리군은 추격해 왔다. 도시와 강이란 천연의 방어선을 포기한 채 몽골군의 長技(장기)인 유인책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4월10일 몽골군은 야간에 좁은 사조江을 건너 헝가리군을 기습하였다. 우회, 유인, 기습은 기동력에 자신을 가진 몽골군의 전형적인 전술이었다. 이 3중주에 걸려든 헝가리군은 이날 섬멸되었다. 7만의 戰死者를 냈다. 헝가리 왕은 아드리아海쪽으로 달아났다. 몽골 군대는 벨라 4세를 추격하여 지금의 발칸지방에 이르니 왕은 지중해의 한 섬으로 달아났다. 이때 몽골군대 사령부에 오고데이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바투는, 철군을 명령했다. 유럽을 살려준 명령이었다. 
     
   기자는 1996년에 몽골에서 헝가리까지 유라시아의 몽골 벨트 지역 15개국을 약 60일에 걸쳐 취재한 적이 있었다.13세기 초 징기스칸의 몽골 기마군단이 高麗(고려)에서 헝가리에 이르는 문명세계의 거의 전부를 정복했을 때 몽골 본토의 인구는 1백만에 불과했으나 점령지의 인구는 약 1억이었다. 이런 '1당 백'의 정복과 통치가 어떻게 가능했느냐 하는 데 대해서 서양 학자들은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 1927년에 영국의 전략사상가 리델 하트가 쓴 '위대한 지휘관들을 벗긴다(Great Captains Unveiled)'라는 책을 읽어보았다.
  
   그 첫 장이 징기스칸과 그의 휘하 장군 스부데이를 다루고 있었다. 스부데이는 징기스칸의 손자인 바투를 모시고 러시아와 유럽을 원정했던 勇將(용장)이다.
  
   이 章(장)의 결론에서 著者(저자)는 몽골 기마 군단 조직의 간편성(Simplicity)을 승리의 근본으로 꼽았다. 몽골 군단은 보급부대가 따로 없는 전원 기병이었다. 기병 한 사람이 말을 4∼5마리씩 몰고 다니면서 짐을 나르는 데뿐 아니라 비상식량이나 물통(사막을 건너갈 때는 말의 피를 빨아마셨다)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느린 보급부대가 따라 다니지 않으면 전투부대의 이동속도는 엄청 빨라진다. 나폴레옹의 유명한 공식에 따르면 <전투력=무장력x기동성>이다. 몽골군단은 全員(전원)기병체제 덕분에 농경민족 군대보다 4∼5배나 빨랐다.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서 몽골군단은 갑옷도 가볍게 만들었다.
  
   몽골 군단은 지금도 깨어지지 않는 기록을 두 개 갖고 있다. 그들은 1237∼1238년 겨울, 그리고 1240∼1241년 겨울 두 차례 러시아로 쳐들어가 겨울 작전을 성공시켰다. 수 백년 뒤 나폴레옹과 히틀러를 굴복시켰던 러시아의 冬(동)장군도 몽골 기마군단의 지구력을 꺾지 못했던 것이다. 몽골 기마군단은 1241년 초에는 헝가리 정복전에서 하루 평균 1백km를 주파했다. 이 속도는 2차세계대전에서 기록된 독일 기갑군단의 돌파속도보다 더 빠른 것이었다. 

   세계사를 바꾼 간편성의 전략사상
  
   당시 유럽의 騎馬(기마)전법은 중무장이었을 뿐 아니라 보병과 연계된 조직이었다. 성격이 다른 이런 두 조직을 지휘하는 것은 기병 單一(단일) 조직보다도 복잡하다. 인간이든 조직이든 복잡하면 기동성이 떨어지게 돼 있다. 기자가 헝가리에 가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중세 유럽 기사들의 갑옷 무게는 약 40kg이었고 말에 덮어씌운 甲胄(갑주)까지 보태면 100kg을 넘었다. 이런 말은 넘어지면 혼자서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영화에선 근사하게 보이지만 이런 로보캅 같은 중무장은 결국 죽기 싫다는 방어적인 심리를 반영한다. 이는 복잡한 규정을 많이 만들어 철갑처럼 자신을 둘러싸고는 무사안일을 추구하는 관료조직에 비유할 수 있다. 유럽 기사들은 창과 칼을 主(주)무기로 썼다.
  
   그들은 활이 비겁한 무기라 하여 법으로 금지시키기도 했고 하층민의 무기로 제한했다. 세종대왕이 野人(야인)들에 대한 간첩작전을 지시하니까 '오랑캐를 상대로 어찌 속임수를 쓸 수 있겠습니까'하고 들고 일어났던 주자학 선비들의 僞善(위선)을 연상시킨다. 도덕을 아무 데나 갖다대면 결과는 가끔 非도덕으로 나타난다.

   중무장한 유럽기사들에 대하여 몽골기만군단의 고전적 戰法(전법)은 200∼300m쯤의 거리를 두고 활로써 집중사격을 하여 혼란에 빠트린 다음 돌격하여 요절을 내는 것이었다. 몽골 군단은 또 퇴각을 위장하여 유럽기병들을 유도, 분산시킨 다음 삽시간에 재집결하여 분산된 敵(적)을 각개 격파하는 戰法(전법)도 즐겼다. 이것은 기동성에서 앞섰기 때문에 가능했다. 리델 하트는 몽골군단의 全員기병제를 참고하여 영국도 步兵(보병)에서 독립된 순수한 기갑군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이 책을 통해서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인 것은 히틀러의 장군들이었다. 독일 기갑군단의 아버지로 불리는 구데리안은 '나는 리델 하트의 제자다'고 말한 적이 있다. 프랑스의 드골 대령도 독립기갑군단의 창설을 주장했던 사람이다. 2차 세계 대전의 초장에서 독일이 전격전으로써 연전연승한 것은 탱크들을 보병사단에 분산시켜 놓지 않고 단일한 기갑군단 조직으로 집중시킨 덕분이었다. 편 손가락이 아닌 불끈 쥔 주먹을 만들었다는 얘기이다. 이 발상의 근본이 간편성(Simplicity)인 것이다. 리델 하트에 따르면 기동성은 간편성에서 나오고 기동성은 중무장보다도 더 안전한 방법이란 것이다. 즉, 빠르면 산다는 뜻이다.
  
  
간편성은 자신감에서
  
  놀랍게도 미국의 가장 성공한 최고경영자 잭 웰치가 몽골 기마군단의 성공 원리와 꼭 같은 내용을 경영의 원리로 삼고 있다. 그는 GE의 회장일 때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신속하려면 (조직이나 경영지침이) 간편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複(복)문장의 脚注(각주)가 붙은 경영지침을 누가 따르겠습니까. 간편하지 않으면 빨라질 수 없고 빨라지지 않으면 이길 수 없습니다. 엔지니어에게 간편성이란 간결하면서도 기능이 우수한 디자인을 뜻합니다. 영업인들에게는 이 간편성의 원칙이 투명한 거래를 의미합니다. 생산현장에서는 모든 작업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상식적인 작업과정을,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쉽게 말하고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또 '자신 없는 경영자들일수록 복잡한 것을 만들어낸다'면서 '겁이 많고 불안한 관리자들은 뚜꺼운 계획서와 슬라이드가 있어야 안심을 하는데 그 내용은 하나마나한 것들뿐이다'고 했다. 잭 웰치는 그러면서 '신속성(Speed)은 간편성(Simplicity)에서 우러나오지만 이 간편성은 자신감(Self-Confidence)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그런 자신감은 관료주의의 충복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다. 직위가 아니라 진정한 성취에서 보람을 찾으려 하는 사람, 정보를 공유하고 자신의 주변, 上下(상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사람, 그런 다음 대담하게 행동하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조직과 인간관계의) 간편성을 창조하는 자신있는 사람들이다.'
  
  
몽골인종의 오기
  
   그러면 웰치는 이런 성공의 3S 조건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직경영에 적용하는가.
   <능력의 한계를 벗어날 정도로 과중한 업무를 맡은 경영진은 가장 능률적이다. 자질구레한 데 신경 쓰고 참견하여 부하들을 귀찮게 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사무실 근무자는 현장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현장으로부터 보고를 받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보고는 사무실에서 현장으로 향해야지 거꾸로가 돼서는 안된다. 우리는 옛날에는 몇년 걸리던 투자결정을 이제는 며칠만에 해치우고 있다>
  
   자신감(Self-Confidence)-간편성(Simplicity)-신속성(Speed)의 3S 공식에서 몽골인종과 자신감의 문제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기자가 하버드 옌칭 도서관의 어두컴컴한 書庫(서고)에서 찾아낸 '위험한 변경(The Perilous Frontier)'이 그 해답을 안고 있었다. 북방 유목민족 전문학자 토마스 J.바필드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기마유목민족들은 가장 발달된 정착문명인 중국과 인접하여 살면서도 중화적 문화와 이념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속으로는 그들의 삶의 방식을 경멸했다. 돔의 천장 같은 광활한 하늘 아래에서 말젖과 말고기를 먹으면서 천막에서 나고 죽고 전쟁과 모험을 동경하는 자신들의 삶이 농경민족보다도 더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목축생활이 유지될 수 있었고 이에 기초한 기만군단의 우세도 계속될 수 있었다>
  
   高麗史(고려사)에는 몽골장군 흔도가 고려 장군 金方慶(김방경)에게 한 이런 말이 실려 있다.

  <내가 보건대 고려 사람들은 모두 글도 알고 불교를 믿는 것이 漢族(한족)과 유사한데 매양 우리를 멸시하면서 '몽골 사람들은 살육만 일삼으니 하늘이 그들을 미워할 것이다'라고들 한다. 그러나 하늘이 우리에게 살육하는 풍속을 준 것이기 때문에 하늘의 뜻에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것에 불과하니 하늘은 그것을 죄로 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그대들이 몽골 사람들에게 굴복하게 된 까닭이다>
  
   먹물 먹은 사람들에 대한 武士(무사)들의 경멸과 '우리 식'에 대한 자부심을 담고 있는 흔도의 이 오기서린 일갈은 몽골기마군단의 파괴력이 자라난 정신적 토양을 보여주고 있다.
  
   기자는 해외 여행을 여러 번 한 뒤에 이런 원리를 발견했다. '선진국은 제도와 사람이 간편한 곳이다'는 원리가 그것이다. 예컨대 선진국 사람들은 넥타이를 안 매는 경우가 많다. 기자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여행했을 때 종일 돌아다녀도 넥타이 맨 사람을 세 사람 보았을 뿐이다. 이 나라는 국왕도 공식석상에 나와 넥타이를 풀어버린다고 한다. 제도가 간편하고 사람들이 소박하면 살기가 편리한 것이다.
  
   이 복잡한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간편하게 살 것인가. 간편해지려면 일과표의 많은 부분을 잘라내야 하므로 이것은 결단이다. 冠婚喪祭(관혼상제)의 문제, 소비성향, 인간관계, 복장, 話法(화법), 예절,회의, 업무처리 방식 등 많은 부분에서 무엇을 줄이고 없애야 본연의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도로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하루에 해야 하는 일들의 가짓수를 줄이는 대신에 좁은 주제를 붙들고 깊게 파고들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것인가. 천재와 영웅은 집중하는 사람이다.
Traditional Mongolian Music & Dance "My Beloved Country Mongolia